2022.12.18 주일 설교. 불안한 시대에 읽는 룻기 4: 나는 정말 불행한가?(룻1:19~22). 양은익 목사.

 

나는 정말 불행한가?(룻1:19~22)

1.
쉽지 않은 오늘 말씀의 제목은 박용래 시인(1925-1980)의 ‘고향’이라는 시에서 빌려 왔습니다.

눌더러 물어볼까
나는 슬프냐
장닭 꼬리 날리는
하얀 바람 봄길
여기사 부여( 夫餘), 고향이란다
나는 정말 슬프냐 (고향, 박용래, 1960.3)

무엇인가 슬픈 일이 있는 시인이 스스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슬픈가? 나는 정말 슬픈가?’ 잘 묻지 않는 질문이지만 시인은 자신의 슬픔이, 정말 슬픈 것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슬픔’을 확인해 보는 시인을 보면서 저는 ‘불행’을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불행한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불행합니까? ‘나는 울다가 지쳤습니다.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시고, 나의 잠자리는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시6:6. 공동)는 시인의 고백은 무시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누구에게나 불행은 있고, 불행은 힘듭니다. 불행은 힘이 셉니다. 불행에 무력하고, 불행에 끌려 갑니다. 불행에 무너집니다. 그래서 힘든일 생기면 불행하다, 운 없다. 재수 없다라고만 생각합니다. 불행이라 말하는 것들이 정말 불행한 것인지, 불행은 불행으로만 끝나야 하는 것인지, 그 이상은 없는지 한번 쯤은 물어볼만 한데 거의 묻지 않습니다. 불행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묻고, 확인해 봐야 합니다. ‘나는 정말 불행한가?’ 좋은 답을 발견하면 좋겠습니다.

2.
오늘 본문에도 힘들다, 불행하다 탄식하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고백의 주인공은 나오미입니다. 나오미가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고향 베들레헴에 도착합니다. 떠날 때 함께했던 남편과 두 아들을 객지에 묻고 돌아오는 ‘슬픔 귀향’이고, 빈 손으로 돌아오는 ‘초라한 귀향’입니다. 그래도 고향 사람들은 나오미를 잊지 않고 떠들석 하게 환영합니다. ‘잘왔어요, 고생했어요’. 그러면서 나오미를 보는데 예전의 나오미가 아닙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피부도 거칠어지고, 체중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정말 나오미 맞아요?’

여자분들은 이런 말에 충격이 큽니다. 몰라 보겠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나오미가 안에 있던 말들을 토해내기 시작합니다. 얘기의 요지는 다른게 아닙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아느냐?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됐다’. 20절, 21절 두 절 속에 하나님의 칭호가 네 번 나옵니다. 두 번은 여호와로 나오고, 두 번은 전능자로 나옵니다. 20절. 전능자가 ‘심히’ 괴롭혔다. 21절. 여호와가 텅빈채로 돌아오게 했다. 여호와께서 징벌하셨다. 전능자가 괴롭게 하셨다. 주어는 전부 ‘하나님’이고, 목적어는 4번 전부 ‘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 자신에게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요청합니다. ‘이제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아 달라’. 나오미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아, 기쁨아’ 도저히 들어 줄 수 없으니 이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보는 것처럼 내가 무슨 기쁨인가? 나는 기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쓴 사람이다’. ‘마라’라고 불러달라. 나오미의 이런 고백을 보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얼마나 힘들면 이런 말까지 했겠습니까? 나오미에게 믿음이 없는 게 아닙니다.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있는데도 이런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불행하다. 나는 슬프다’

나오미는 지난 10여년을 ‘아슬아슬’하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삶은 말 그대로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합니다. 뭘해도 초조하고, 걱정입니다. 의지했던 남편과 힘을 주던 두 아들 전부 죽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고, 언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얼마나 아슬아슬합니까? ‘불안하고, 불행하다’ 생각할만 합니다. 아마도, 몰라보게 달라진 나오미의 탄식과 고백을 베들레헴 사람들도 공감하면서 들었을 것입니다.

3.
지금 나오미는 자신이 힘든 이유,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전능자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도 많이 하는 일입니다. 힘든 일 생기면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탓합니다. ’하나님이 이럴 수 있어!’ 마치 하나님이 불행을 주고, 하나님이 내 고통의 원인인 것 처럼 몰고 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섭섭하고, 힘들어서 하는 말이겠지만, 하나님이 불행을 주고, 고통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전능자가 불행을 준 것이라면 우리가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의지해야 할 하나님이 내 고통의 원인이라면 그것만큼 힘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불행 가운데 있을때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불행의 원인인가? 정말 나는 불행한건가? 이 불행이 끝인가? 그 이상은 없는가? 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인가? 하나님 탓을 하기 전에 물어서 답을 발견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수용됐던 아이슈비치에는 ‘아이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수용소의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책을 지나가는 순간 아이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어른’이 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목도하는 깊은 고통이 아이들을 어른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고통이 주는 힘이 이렇게 큽니다.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는 가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내 주변이 달라집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면 더 견디기 힘들고, 더 공허해 집니다. 불행한 일 앞에서, ’나는 정말 불행한가?’라는 물음에 ‘아니요’라고 답할 수 있는 조건은 많지 않습니다. 불행을 불행 아니라 말할 수 있는 힘과 인식은 ‘믿음’에 있습니다.

불행이라는 삶의 현실을 불행으로 끝내지 않고 넘어서려면 전능자와 화해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쁜 감정 털어내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할 때 불행을 이겨내는 영성과 성품과 능력이 나옵니다. 지금 나오미에게 필요한 것은 ‘전능자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지고 있던 나쁜 감정 풀고 하나님과 친밀해 져야 합니다. 그래야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이 찾아집니다.

나오미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불행하다 생각할 때 하나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불행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전능자인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분의 손을 잡을 때 나옵니다. 우리는 그렇다고 믿는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은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있고,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없는’게 현실이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불행한 일들이 만들어내는 하나님과의 불화를 끝내고 불행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인정하고,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고통을 겪고, 불행한 삶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모를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는데 이런 어려움과 시련에 우리가 이렇게 무력하게 무너져야 하는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없는 순간은 한 순간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순간마다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곁에 계신다고 하는 이 믿음이 우리가 가진 힘의 원천입니다.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당당한 사실인데 우리가 많이 잃어 버리고 살아갑니다.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아슬아슬하지만, 하나님은 견고하십니다. 아슬아슬할수록 하나님과 불화하지 말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화목해서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4. 묵상: 하나님은 곁에 계신다.
전능자와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가? 한 가지만 묵상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곁에 계신다’,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 이 의식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합니다.‘곁에 계신 하나님’은 불행하다 생각할 때 가져야 하는 믿음이고, 신학입니다.

십자가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부재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함께 하시고, 가장 가까이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순간에도 부재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순간은 없습니다. 불행의 순간에 내가 멀어지면 멀어졌지 하나님은 멀어지지 않으십니다. 이런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탄의 주님을 우리는 ‘임마누엘’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sign이 주님의 오심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아 차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행과 고통에 수동적이지 않으십니다. 능동적으로 개입하시고, 우리의 불행과 고통을 이기게 해주십니다.

흑인들이 노예생활 할때 가졌던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길 없는 곳에 길을 내신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막혔을 때 홍해에 길을 내신 하나님을 보면서 가졌던 확신입니다. 없는 길 앞에서 모세가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출14:13, 14).

바울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예수)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질그릇 같은 연약한 우리지만 그 안에 보화를 가진 우리)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후4:7~11. 공동)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 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4:16~18, 공동)

이런 믿음의 담대한 의식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불행이 크고, 깊어도 하나님을 이길 불행은 없습니다. 불행보다 크신 하나님이 곁에 계십니다. 이건 픽션(fiction)이 아니라 넌픽션(nonfiction)입니다. 종교적 위안이 아니라 역사입니다. 그렇다고 믿는 정신 승리가 아니라 벌어질 현실입니다.

불행한 삶으로 아플 때 ‘곁에 계신 하나님께’, 아픔을 가지고 나가 말하십시오. 기도입니다. 곁에 계셔서 말씀하시는 전능자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말씀입니다. 전능자께 말하고, 전능자의 음성을 들을 때 길이 보이고, 평화가 선물처럼 찾아 옵니다. 불행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나는 불행한가?’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니네요, 불행 안에 하나님이 계시네요’ 이런 대답하면 좋겠습니다. 성탄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평화의 왕을 바라보면서 불행한 삶에 지지 않고 이기시는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