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이긴 환대(룻1:15-18)
오늘 읽은 본문에는 예사롭지 않은 룻의 고백과 룻의 마음이 나와 있습니다. 담아야 할 게 많은 본문입니다. 지난 주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힘들게 살아가는 세 여인이 동행하면서 슬픔을 이겨내는 모습을 봤습니다. 나오미와 오르바, 룻은 시어머니의 고향인 유다를 향해 함께 길을 떠납니다. 동행하기 힘든 길이지만 두 며느리는 기꺼이 시어머니와 함께 합니다.
나오미가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아마 고마웠기에 이들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모압과 유다의 국경선에 다가오자 그동안 꾹 참아왔던 하기 힘든 어려운 말을 합니다. ‘이제 그만 친정으로 가라. 그동안 나에게 잘해준 것만해도 너무 고맙다. 아무 것도 없는 나와 함께 하면 고생길이 훤하다. 그러니 돌아가 새출발해라’.
갈 수 없다고 우는 며느리들을 설득해서 오르바가 떠나게 됩니다. 이제 룻도 떠나야 되는데 어떻게 된건지 떠나는 오르바를 보고 룻은 나오미를 더 깊게 붙잡습니다. 14절 끝에 보십시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붙좇다’는 말은 창2:24의 나오는 단어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어다’. ‘합하다’는 말이 ‘붙좇다’(דָּבַק,dabaq)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붙좇는다는 말은 ‘결혼의 단어’입니다. 부모 떠나 둘이 합하여, 착 달라 붙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인데, 룻은 자신도 어머니와 합하여, 어머니에게 착 달라붙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룻이 어떤 행동을 할지를 미리 보여주는 단어를 룻기 기자가 쓰고 있습니다. ‘룻은 오르바 처럼 안 떠난다’. 룻이 떠나지 않으니까 나오미는 룻을 또 한번 밀어냅니다. 이번이 세번째입니다. 15절. ‘오르바가 갔다 .너도 따라 돌아가라’
이 얘기를 듣고 룻이 처음으로 입을 엽니다. 지금까지는 울기만 했지만 더 이상 가만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입을 여는데, 한번 보십시오. 룻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기가 막힙니다. 잠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은 쟁반에 금 사과’(잠25:11)처럼 구구절절 하나도 버릴게 없는 듣는이의 심금을 울리는 말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룻이 말합니다. ‘어머니를 떠나 돌아가라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갈 곳이고, 어머니 머무시는 곳이면 어디든 머물 것입니다. 어머니 백성은 이미 내 백성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은 이제 내 하나님입니다’. 낯선곳, 다른 종교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말입니다. 이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머니 죽으면 나도 거기서 죽겠습니다. 죽는 일 외에 어머니 떠나면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스토킹이 아닙니다. 장래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언제나 함께 하겠다는 약속과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며느리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며느리뿐만이 아닙니다. 이런 사위, 이런 남편, 이런 부인 보고 싶습니다. 찾아 보시고, 만나시고, 없으면 스스로 그렇게 되십시오.
룻이 다짐하는 이 장면을 보고 싶습니다. 룻의 나이 많아야 25살 전후입니다. 마음도 편치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 정연하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니고, 써와서 읽는 것도 아닙니다. 노상에서 돌아가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을 듣고 그럴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담아 토해내고 있는 다짐과 고백이 오늘 우리가 보는 룻의 맹세입니다.
룻의 다짐을 보면 뜨겁고, 신념에 차 있습니다. 사막 한 가운데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싱싱해 보입니다. 거친 산골짜기 산등성에서 피어나는 한송이 꽃같습니다.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이에게 자신의 인생을 거는데도 단호하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아브라함 처럼 떠나면 복을 주겠다는 약속도 없었고, 도와준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보호해 줄 새 남편을 찾지 않고, 죽고 없는 옛 남편의 힘없는 어머니를 따라갑니다. 불행을 끌어안고 불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가요? 슬쩍 보면 어리석어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룻은 고수입니다. 어리석지 않고 현명하고 누구보다 깊습니다.
룻의 고백을 보면서 단어 두 개만 묵상하겠습니다. 하나는 환대고, 다른 하나는 연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절실한 단어들입니다. 룻에게서 이 모습이 나옵니다.
1. 환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첫번째 묵상 환대입니다. 환대를 많이 생각해 보십시오. 환대는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마음에 새기십시다. 환대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환대는 너를 환영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결혼 서약 기억해 보십시오. ‘좋을 때나 나쁠때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아프거나 죽음이 갈라 놓을때까지 함께 하겠다’. 환대입니다.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환대이고,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환대입니다.
룻이 하는 다짐과 맹세는 결국 나오미에 대한 환대입니다. 나오미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자입니다. 위태하고 불안합니다. 나올 게 없습니다. 하지만 룻이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어머니 가는 곳, 어디든 가겠습니다. 어머니 백성, 어머니 하나님은 내 백성이고,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니 죽는 곳에서 나도 죽겠습니다’. 이런 환대가 어디있습니까? 존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조건이 나쁘고, 힘들면 떠납니다. 냉대하고, 박대하는데 룻은 환대하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룻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을 들었을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큰 위로를 받지 않았겠습니까?
룻과 나오미 모두에게 환대가 있습니다. 나오미도 룻을 환대했고, 룻도 나오미를 환대했습니다. 둘 다 환대로 보답받게 됩니다. 나오미는 룻의 환대를 받고, 룻은 보아스의 환대을 받습니다. 불행을 서로의 환대로 이겨 나갑니다. 오늘 제목이 ‘불행을 이긴 환대’로 되었는데 환대에는 불행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냉대와 적대로는 불행을 이길 수 없습니다.
환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너무 많습니다. 환대가 있을때 친교의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그 공간을 통해 격려가 일어나고, 응원이 일어납니다. 냉대와 완전 반대입니다. 냉대는 단절과 미움 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환대가 있을 때 비로서 ‘함께 사는 것’(living together)이 가능해 집니다. 함께 사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것(living-well-together)’이 가능해집니다. 불안하고, 힘들수록 함께 살아야 하는데 함께 잘 살려면 ‘환대’가 있어야 합니다.
환대가 없으면 함께 살 수도, 함께 잘 살 수도 없습니다.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불안하고, 슬플수록 서로가 환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냉대와 배제로 가득한 세상에 던지는 도전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환대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환대해야 하는데 환대가 부족합니까? 내 환대의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2. 연민, 환대를 만드는 마음.
두 번째 묵상은 연민입니다. 연민은 환대를 만드는 마음입니다. 환대의 삶을 살고 싶으면 연민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연민이 없으면 환대도, 환영도 할 수 없습니다.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연민이 필요하다. 연민은 ‘함께 살고’(living together), ‘함께 잘 살기’(living-well-together) 위해 가져야 할 마음과 정신과 감정의 상태입니다.
연민의 의미는 영어 단어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연민은 Com+passion입니다. 함께 고통하는 것입니다. 연민은 동정도 아니고, 불쌍히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측은함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깊습니다. 측은하여 함께 고통을 받고,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 이게 연민입니다.
룻이 아무 것도 없는 나오미를 환대할 수 있었던 것은 룻에게 고통을 함께 하려고 하는 ‘연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고통을 나눌 마음(=연민)이 있었기에 이런 다짐과 맹세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룻에게 왜 이런 강한 연민이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오미의 환대와 나오미의 연민을 먼저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닐 것입니다.
연민의 마음을 가지려면 가져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이타심과 공감(남의 아픔을 제 아픔으로 느끼는 것)과 사람에 대한 존중입니다. 연민을 만드는 마음들입니다. 모른긴 해도 룻의 마음에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룻이 대단하다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운도 없고, 불행한 사람 아닙니까? 비뚤어져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숙하고 사람이 깊습니다. 자기만 보지 않고 남을 보고, 남의 아픔을 봅니다. 이 연민의 마음이 환대를 가져 온 것입니다.
연민은 신앙인들의 필수 마음입니다. 신앙이 있는데 연민이 없다.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민의 하나님인데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연민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고통과 곤경에 성육신하심으로 동참하셨고, 십자가에서 최고의 연민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과 아픔에 함께 하시는 연민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연민은 이 땅에 정의를 세우는 것으로 나타나십니다.
연민이 없으면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들에게 연민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연민이 없으면 세상은 동물의 세계가 됩니다. 동물의 세계는 연민이 없는 세계입니다. 남의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느끼지 못하면 찌릅니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판단합니다. 상처가 나면 더 깊게 파고 들고, 후벼댑니다. 괴물이 됩니다.
연민은 가져야 되고, 풍성할수록 좋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깊게 보면 남의 아픔도 보이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지독한 악과 비정함을 아파하면서 깊게 기도할 때 연민은 내 안에 쌓여 갑니다. 연민은 약한자들이 보이는 감정의 배설구가 아닙니다.
연민의 힘은 큽니다. 룻 보십시오. 연민으로 인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과감히 놓아 버립니다. 세상은 기회를 못 잡아서 안달인데 룻은 기회를 놔 버립니다. 대단한 힘입니다. 연민 때문에 희생하고, 연민 때문에 환대하고, 사랑하고, 동행합니다. 연민으로 인해 변화가 시작되고, 회복이 시작됩니다. 다 룻에게 일어난 일들입니다.
룻의 환대와 연민은 나오미를 살리고, 나오미의 가문을 살리고, 그림자처럼 따라 붙던 룻 자신의 불행을 떼 버리고, 룻을 축복의 자리로 이끌어 갑니다. 굉장합니다. 환대와 연민을 품은 룻의 다짐이 주는 울림은 큽니다. 우리의 모습이 되면 좋겠습니다. 환대와 연민을 품은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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