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5. 주일 설교. 불안한 시대에 읽는 룻기 5: 불행이 지나가는 자리(룻2:1~16). 양은익 목사. 성탄절. 송년주일

 

불행이 지나가는 자리(룻2:1~16)

성탄절과 송년 주일이 함께 있는 주일입니다. 성탄의 기쁨도 있고, 송년의 감사도 있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룻기서 2장입니다. 말씀의 제목은 ‘불행이 지나가는 자리’ 입니다. 1장에서는 계속되는 불행으로 고군분투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이제 2장에 오면 ‘불행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여서 한결 마음이 좋습니다. 살면서 불행은 오고, 불행은 가지만 불행은 가는 게 좋습니다.

성탄과 송년 주일 아침에 기도합니다. ‘불행이라 여기는 힘든 삶이 있다면 지나가게 하사 다시 새 힘을 얻게 하옵소서’. 아멘.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에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한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마치 무르익은 과실처럼 운 좋게 저절로 입안으로 굴러 들어오지 않는다’. 뒤집으면 ‘불행도 저절로 빠져 나가지 않는다’가 됩니다. 행복도 불행도 저절로 들어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지만 이 상식을 잊어 버릴때가 많습니다. 불행은 힘들고, 힘이 쎕니다. 저절로 나가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세력입니다. 불행을 지나가게 하려면 불행이 지나가는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있을 때 지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보고 싶은 게 이것입니다. 불행이 지나가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게 무엇인가? 두 가지만 본문을 보면서 묵상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룻과 보아스입니다. 룻은 1장에서부터 계속 나왔고, 보아스는 2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 두 명에게서 불행을 이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룻에게서는 ‘자립’이 보이고, 보아스에게서는 ‘동행’과 ‘동행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립과 동행, 이 두 요소가 불행에 끌려 다니지 않고, 불행을 지나가게 만드는 무시 못할 힘입니다.

1. 자립의 의지
첫 번째 묵상 들어가겠습니다. 첫번째 묵상은 룻이 보여준 자립의 의지, 자립의 마음입니다. 자립의 의지,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사시면서 언제 제일 강하셨습니까? ‘스스로 일어나겠다는 의지’는 힘든 순간에 가져야 하는 ‘필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 일어나자’.‘힘든 자’는 ‘힘이 없는 자’이기에 ‘스스로 일어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력을 다해야 일어 설 수 있습니다. 힘들 때의 ‘자립’은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룻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나비의 날갯짓 같은 작은 일어남입니다. 하지만 작게 시작한 그 날갯짓이 룻의 인생과 구원의 역사에 거대한 태풍을 만들어 내는 소위 말하는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로 나타나게 됩니다.

2절에 룻이 시작한 작은 날개짓이 나옵니다. 룻이 불안한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이제 제가 밭으로 가겠습니다. 가서 추수하고 남은 이삭 주워 오겠습니다.’ 이게 시작입니다. 별거 아닌듯 보이지만 당시 상황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룻은 홀로된 젊은 이방여자입니다. 뒤에 보면 남자들 조심하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입니다. 힘든 상황이 룻을 떠밀고 있지만 선뜩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나가서 ‘이삭을 주워 오겠다’, 생존입니다. ‘죽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내가 밭으로 가겠습니다’(2절). 이 말속에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상황을 이겨 보겠다는 단호함, 위험하지만 감수하겠다는 ‘대담함’,비천한 일이지만 상관하지 않겠다는 ‘낮아짐’, 나오미 따라 올 때 맹세한 것에 대한 ‘책임감’. 이런게 보입니다.

불행이 지나가기 위해서는 ‘허영’과 ‘비교’는 금물인데 룻에게는 이게 안 보입니다. ‘허영’이 있으면 비천에 처할 수 없습니다. ‘비교’하게 되면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게 됩니다. 분노와 원망이 쌓입니다. ‘허영’과 ‘비교’는 자립을 방해하는 독입니다.

빌4:12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은 자립할 때 꼭 있어야 하는 자세입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룻의 마음으로 볼 만합니다. 룻은 허영 없이,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교 없이 묵직하게 ‘평정심’을 가지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담대하게 이삭을 줍기 시작합니다. 이 작은 시작이 룻을 훨훨 날아가게 만듭니다.

자립의 의지를 품은 룻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3절 중간, ‘우연히’ 시아버지의 친족인 유력한 자, 보아스의 밭으로 들어가, 보아스를 만나게 하고, 그와 결혼하게 하사, 다윗의 조상이 되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는 메시아의 조상이 되게 하십니다. 작은 날개 짓이 태풍이 되 버렸습니다.

불행한 일 앞에서 ‘일어나려고'(=自立)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우연’을 가장한 ‘섭리’로 인도하십니다. 룻이 베들레헴의 많은 밭 가운데 보아스의 밭에 들어간 것은 우연이지만 우연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우연은, 불행에 무너지지 않고 일어서려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하심일 수 있습니다. 일어서면 우연이든 필연이든 섭리든 일어나지만 일어서지 않으면 우연도 필연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립의 의지 가지고 룻처럼 밖으로 나가면 우리도, 신비하고, 이상한, 신나는 우연 경험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경험해 보십시다. 불행이 하나 둘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2. 동행의 의지.
두 번째 묵상입니다. 두 번째 묵상은 ‘동행’입니다. 힘들 때는 혼자 보다는 ‘함께’가 필요합니다. 나와 너의 동행, 함께 하려는 의지는 불행을 지나가게 하는 큰 힘입니다.

‘나 혼자 할 수 없다. 파도는 높고 험하며, 사방은 짙은 안개, 하늘의 빛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 둘이면 결국 이기는 것을, 예수와 나. 인생의 바다에 나선 나의 배, 나 혼자 저어갈 수 없으니, 내 곁에 앉아 나와 함께 노를 잡고 젓는 분 계신다. 우리 둘, 안전하게 항구에 닿으리라. 예수와 나’ 불행의 높은 파도를 헤쳐 나가려면 주님도 있어야 하고, 동행자도 있어야 합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서 성실하게 이삭을 줍는 룻을 발견하고 8절부터 룻과 대화를 이어가게 되는데 대화하는 모습이 놀랍습니다. 보아스에게는 환대와 배려가 넘치고, 롯에게는 감사와 넘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 밭에서 떠나면 안된다. 여자들과 다녀야한다. 남자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말해뒀다. 목마르면 이 물 마셔라. 나는 네가 보호 받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상 받기를 원한다. 이리와서 함께 먹자’ 게중에는 보아스가 젊은 여자에게 흑심을 품어서 잘해 준다고 하는 대단히 흑심 섞인 해석을 하는데 잘못 본 것입니다. 보아스는 힘든 가운데 일어선 룻을 격려하고, 배려하는 환대자일뿐입니다.

보아스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키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보아스의 마음과 말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키는 보아스의 어머니입니다. 보아스의 어머니는 출애굽의 소문을 듣고 마음이 녹아 하나님께 회심한(수2:11) 여리고 성의 매춘부 라합(수2:1)입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들을 구해준 사람입니다. 이 기생 라합이 ‘살몬’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방백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가나안 여인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에 남긴 선물같은 존재입니다. 놀랍지요. 다윗의 조상, 메시아의 조상에 매춘부가 있고, 그 아들의 부인 또한 이방 여자입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보아스를 보면 룻기의 그림이 달라집니다. 보아스의 사연을 모르는 사람은 보아스가 사람이 좋아서 룻에게 친절을 베푸는 정도로 알겠지만, 보아스 뒤에 서려있는 가련했던 어머니 라합의 그림자를 보게 되면 보아스가 베푼 선행과 보아스와 룻이 나눈 대화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룻이 묻습니다. ‘왜 나같은 이방 여인에게 과분한 은혜를 베푸십니까?’(10절) 보아스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 켠에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에 숨이 막혔을 지도 모릅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자신 앞에 엎드려있는 룻의 모습에서 그 옛날 무력했던 자신의 어머니가 겹쳐 보인다면 과장이라 하시겠습니까?

어머니가 겪었던 아픔을 안고 보아스는 룻의 질문에 답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이 일에 대해 네가 보답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 곳에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기를 원한다’. 마치 그의 어머니 라합이 두 명의 정탐꾼들을 보호해주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은 것처럼 롯도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어머니의 슬픈 삶을 늘 마음 언저리에 품고 살던 보아스는 진심을 가지고 룻을 기원하고 축복했을 것입니다.

지금 보아스가 보여주는 환대는 유력한 자가 무력한 자를 품는 놀라운 환대고, 속 깊은 동행입니다. 유산자, 무산자, 유력한 자와 무력한 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와 경영자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적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동행도 환대도 힘듭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이 경계를 넘어 환대합니다. 왜요? 보아스는 아픔을 알고 있습니다. 불행한 자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기꺼이 동행하고, 마음 열어 환대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봤지만 나오미는 자신의 불행을 보면서 전능자,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습니다. 어쩌면 룻도 계속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오미처럼 전능자에 대한 원망이 쌓여 갔을지모릅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자들의 아픔을 헤아려 주는 보아스의 진정성있는 ‘환대’와 ‘연민’을 받으면서 그들의 분노와 상처는 아물어 가기 시작합니다. 동행과 환대로 불행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환대는 화해를 가져오고, 화해는 평화와 희망, 믿음과 사랑, 기쁨과 용기를 가져옵니다. 회복이 일어납니다. 거부해서도 안되고, 눈 감아서도 안되는 동행이 주는 귀한 선물입니다. 원망과 적대와 질시로 가득찬 한국 사회, 우리들에게 절실한 모습입니다. 보아스는 동행자고 화해자입니다.

오늘이 성탄절인데, 화해자 보아스의 가문에서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됩니다. 불행한 자를 환대하고, 동행했던 보아스의 모습 속에 훗날의 화해자 예수, 동행자 예수의 모습이 보입니다.

고후5장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5:18, 20. 공동)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많고, 사람에게도 많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사 화해를 청하시니, 이제 그만 화해하고, 아름다운 화해자, 동행자의 삶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들의 고통을 안다. 불행을 안다. 억울함을 안다. 그래서 똑같이 고통 가운데 죽었다. 이 죽음으로 다른 세상을 만들고 싶다. 우리 이제 화해하자. 나와 함께 불행을 끝내자. 종교 천재들의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전능자의 사건이고,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오심입니다. 성탄입니다. 불행과 슬픔 많은 세상에 최고의 동행자, 환대자 예수가 우리에게 오셨답니다. 곁에 계신답니다. 동행하신답니다. 우리도 동행하십시다. 화해하십시다. 평화를 만드십시다. 함께 손잡고 웃으십시다. 슬픈 자를 안아 줍시다. 불행이 자나가게 될 것입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받는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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