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29. 주일설교. 해질녘에 읽는 요한일서 묵상 16: 분별된 사랑과 확신(요일4:1~6). 양은익 목사.

 

분별된 사랑과 확신(요일4:1~6)

1.
오늘은 ‘분별된 사랑과 확신’이라는 제목으로 요한사도의 말씀, 묵상하겠습니다. 지난 두 주간 말씀 제목과 한 단어가 다릅니다. 사랑의 용기, 확신의 용기에서 ‘용기’ 가 빠지고 ‘분별’이 들어갔습니다. 사랑과 확신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분별’도 있어야 합니다. 분별이 있어야 건강한 사랑 할 수 있구요, 바른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분별되지 않으면 사랑도, 확신도 잘못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분별이 필요합니다. 분별의 말 뜻 처럼 ‘분간하고 구별’을 잘하면 실수할 일도 적고, 후회할 일도 적게 됩니다. 분별 잘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분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분별의 이유
(1) 가짜가 있다.(1절)
분별은 가짜가 있기 때문에 해야 됩니다. 가짜는 속입니다. 분별하지 않으면 아차하는 순간에 넘어갑니다. 본문 1절에서 사도 요한이 ‘분별’을 말하고 있는 것도 ‘가짜’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지 못해서 망가진 교회를 보면서 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가짜에 속지 말고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짝퉁’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짝퉁을 ‘이단’이라고 하는데 이단은 말 그대로 끝만 살짝 다르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앙이든, 명품이든 가짜들은 전부 진짜같기 때문에 속기 쉽습니다. 분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2)대가가 크다.
분별이 필요한 이유 두번째는 분별의 대가가 작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별 잘못하면 큰 대가를 치루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 보십시오. 분별에 실패 한 후에 대가가 큽니다. 에덴에서 쫓겨납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을 안해도 분별의 결과는 가볍지 않습니다.

좋은 분별은 평안과 보람과 긍지를 주지만, 잘못된 분별은 갈등과 상처, 후회를 남깁니다.분별은 자기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보호하는 울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 처럼, 이 세대를 본받는 대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마음에 품고 분별할 때(롬12:2) 단단하게 설 수 있습니다. 분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를 묵상했는데 같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3. 분별의 요소
(1) 간파하라(1절)
분별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에 떠오른 단어는 ‘간파’(看破)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다. 가짜가 있다, 간파하라’ 분별은 다른 말로 하면 ‘간파하는 것’입니다. 간파는 ‘깨서 보는 것’입니다. 깨서 보면 보이지 않던 속이 보이고, 숨겨논게 보입니다. 가짜는 대부분 숨기고, 감춥니다. 감언이설로, 포장으로, 이미지로 숨깁니다. 깨고 봐야 분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누가 잘할까요? 간파하는 사람이 잘합니다. 무엇이 아픈지, 무엇을 바라는지 말을 안해도 깊게 간파하는 사람이 사랑을 잘합니다. 정치는 누가 잘합니까? ‘국민’들의 마음을 ‘간파’하는 사람이 잘합니다. 신앙의 삶도 하나님의 마음을 간파하는 사람이 잘합니다.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임재에 주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깨어 있는 사람’, ‘영혼이 깨끗한 사람’이 잘합니다.

사심과 욕심이 가득하면 ‘간파’할 수 없습니다. 간파하지 못하면 분별도 못합니다. 속지 말자 화장빨, 다시 보자 조명빨. 간파의 중요한 자세입니다. 깊게 보고, 자세히 보고, 속을 보면 선명한 분별 할 수 있습니다.

(2) 기준을 정비하라(2-3절)
두 번째 분별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준’입니다. 분별은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분별의 기준이 흔들리고, 모호하면 분별도 왔다갔다 흔들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분별하고 선택하십니까? 분명한 기준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요한 사도의 공동체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은 것은 기준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사도 요한이 사람들에게 제시한 기준은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인데, 일부 사람들이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수 있는가? 예수님은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청년 예수의 몸에 잠시동안, 가짜로 오신 것 뿐이다. 신성의 예수님이 고통을 받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말에 사람들이 끌린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부활이 아니라 부활한 것으로 믿은 것뿐이라는 생각과 비슷한 것입니다. 신앙을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것인데,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 우리가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그리스도는 역사 가운데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과 신앙의 기준입니다.

2,3절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고백)하는 영(사람)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사람)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이니라’

이 선포는 기준에 관한 선포입니다. 육체로 오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준이고, 우리는 예수님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분별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기준이고, 예수님의 사랑이 기준이고, 예수님의 믿음이 기준이고, 예수님의 용서가 기준이고, 예수님의 전도가 기준이고, 예수님의 공의가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찰스 쉘던) 입니다. 이 질문이 매 순간 살아있으면 분별력은 상승합니다. 여러분들의 분별과 결정과 선택에 기준되신 주님이 더 깊게 자리잡기를 바라겠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5-6절)
세 번째 분별의 중요한 조건은 5,6절에 나옵니다. 5,6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분별의 조건은 ‘듵음’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5,6절)

사람은 자기편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에 속한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듣는 소리가 나를 만듭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속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소리를 들으면 문제가 됩니다. 앞에서 봤던 아담과 하와가 분별에 실패한 이유는 ‘들음의 실패’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사탄의 말을 듣고 따라하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신자들의 분별이 실패하지 않고 제 길을 가려면 하나님을 믿는자답게 말씀을 듣고 따라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하나님의 뜻이나 마음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순간에만 묻습니다. 안 묻는 것 보다 나을 수 있겠지만 물어도 길이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들의 분별력과 판단력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매일의 삶에서 성실하게 시간을 들여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묵상할 때 지혜가 생기고,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는 힘이 생깁니다. 매일의 묵상이 세상의 소리를 작게 만듭니다. 매일의 묵상이 없으면 세상의 소리가 커져서 하나님께 속했으면서도 세상의 말을 듣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4.
분별은 평생의 과업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어제의 분별로 풀 수 없습니다. 오늘의 문제와 오늘의 선택은 오늘의 묵상과 오늘의 분별로 풀어야 합니다.

4절에 보면 사도 요한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의 위상이 나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크신 하나님께 속해있기에 세상에 있는 자들에게 지지 않고 이겼다는 것입니다. ‘이겼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와 방법과 방식을 따라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분별과 판단과 선택과 결정은 나와 상관 없는 먼 나라 얘기가 아닙니다. 매일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의 판단과 분별과 선택에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묻어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품고 간파하시고, 주님을 앞세우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것 같은 형통함으로, 좋은 분별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 119:125의 기도가 오늘 아침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주님의 종이니, 주님의 증거를 알 수 있도록 나를 깨우쳐주십시오’(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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