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요일4:7~11)
1.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말진 부대마소.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소이다. 반타고 꺼질진대 애제(아예)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타고 생낙(생나무)으로 있으시오 탈진대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소이다'(이은상 작사. 홍난파 곡)
사랑입니다. ‘사랑은 타는 것, 시작했다면 재조차 남지 않게 끝까지 태우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랑법같지만 그리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재조차 남지 않게 지금도 태우고 계십니까? 아니면 반만 타다 꺼져가는 중에 있습니까?
2.
‘사랑’을 말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요한 사도의 ‘사랑론’이기 때문입니다. 90된 노인의 삶에 이런 감성과 열정이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지금 ‘상황’이 얼마나 안 좋습니까? 박해는 심해지고, 사람들은 이단에 빠져서 교회를 떠나는 낙심천만한 상황인데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말하는 게 ‘사랑’ 입니다.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11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힘들어도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으니 ‘우리 사랑하자’.
오늘 말씀은 노인 요한 사도가 내뿜는 사랑의 뜨거움을 보면서 우리의 사랑도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사랑을 다시 배우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전하려고 합니다. 요한 사도의 사랑론에서 다시 배우기 원하는 사랑 세 가지를 묵상했습니다.
3. 다시 배우는 사랑
(1) 어려운 사랑(7절)
첫 번째 묵상은 ‘사랑은 어렵다’ 입니다. 다시 새기고, 담아야 할 사랑의 실상, 현실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랑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렵습니다. 젊어서는 젊어서 어려웠고, 나이 들어서도 나이들어 어렵습니다. 항상 어렵습니다. 사도가 ‘서로 사랑하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했지만 마음 편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문제가 풀리고, 보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주저합니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왜 어려울까요? 다른 이유 다 빼고,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너’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자’(7절)할 때 ‘서로’를 분해해 보세요. ‘나’만 있지 않습니다. ’너’가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가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자 할 때 ‘너’는 누구입니까? ‘나’ 아닌 사람은 다 ‘너’, ‘타자’(他者)입니다. 타자인 너는 나랑 같지 않습니다. 생각 다르고, 성격 다르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릅니다.
다른 이상 ‘어렵습니다’. 왜 우리가 말 한마디에, 사건 하나에, 감정 표현 하나에 그렇게 쉽게 무너집니까?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원하고, 사랑의 소중함을 안다면 ‘나와 너는 다르다’는 사실부터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지만 ‘너’입니다. 모를 수 있고,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인 누구도 나와 같지 않습니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미움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랑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데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힘든 말이지만, 나와 다른 타자를 사랑하려면 상처 받을 준비가 필요합니다. 고통받을 각오 없이 사랑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결국 강해져야 사랑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사랑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쉽게 생각하면 사랑은 하기 힘듭니다. 사랑은 쉽지 않다. 다시 마음에 담고 삶의 판도와 깊이를 바꾸는 사랑에 심기일전 하면 좋겠습니다.
(2) 받는 사랑(7~8절, 10절)
두 번째 묵상은 ‘사랑은 주기 전에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받는 사랑’이 있고, ‘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게 먼저 와야 합니까? 받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받은 사랑 없이 주는 사랑은 힘듭니다. 저수지에 물이 가득해야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지 없으면 힘듭니다.
‘사랑을 하려면 사랑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 있으려면 사랑을 받아야 한다’.
7절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절) 사랑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사랑의 근원, 사랑의 출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해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알고 계셨습니까?
사람들은 사랑을 자신이 하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봤을 겁니다. 사람들의 사랑이 얼마나 취약한지. 요한은 실망했을 겁니다. 사람들의 사랑이 얼마나 오래가지 못하는지. 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받아서 하라.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받아라. 그러면 사랑이 된다’. 이게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사랑법입니다.
흔한 말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받으면 사랑이 됩니다.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받은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고, 받은 생명을 알 때, 아십니까? 얼마나 감동이 되고, 감사한지. 사랑은 받은바 은혜에서 나옵니다. 은혜가 깊으면 사랑도 깊습니다.
내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내 힘으로 사랑을 한다면, 이제껏 경험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사랑은 어렵고, 힘듭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사랑, 내 힘으로 어떻게 사랑을 합니까? 하지만 사랑은 내 밖에 있어서 들어 옵니다. ‘받으면’ 사랑이 가능해 집니다.
9절과 10절에서 보겠지만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받은 사랑’은 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줍니다. 받은 사랑이 식어질 때마다 이 질문을 깊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찬양에도 있지요. ‘주님, 왜 날 사랑하십니까?’ 맞지 않습니까? 사랑할 이유도 없고, 사랑할 만한 모습도 없는데 사랑하십니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답을 알면 좋겠습니다. 이 물음의 의미를 알고, 이 물음에 정서적으로 반응할 때 마음이 따뜻해지고(시원해지고), 시원해진 그 마음에 사랑이 들어오고, 사랑이 나오게 됩니다. 미움도 필요하고, 정의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더 필요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깊게 받아’ 사랑하면서 사는 복된 인생 만들어 가십시다.
(3) 살리는 사랑(9절.10절 하)
세 번째 사랑의 묵상은 ‘살리는 사랑’입니다. 꼭 가지고 싶은 사랑입니다. 살리는 사랑은 사랑의 최고봉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고, 열 두해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치유 받고, 벳새다 맹인이 눈 뜨고, 주님 배신하던 베드로가 용서받고. 다 살리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최고의 살리는 사랑입니다.
살리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살리십시다. 9절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19절)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도 요한을 한 평생 사랑의 사도로 살게 만든 장면입니다.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솟구치는 거칠고 험한 십자가에서 요한이 본 것은 놀랍게도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내주는 것이라면 ‘너’를 위해 생명을 내 주는 사랑만큼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10절에 하나님이 하신 ‘살리는 사랑’의 모습, 두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는 먼저 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살리십니다. 화목제물은 말 그대로 ‘관계의 회복’입니다. 사람은 물질로만 살지 않습니다. 관계로 사는데, 친밀한 관계, 친밀한 사랑은, 놀랍지요 사람을 살려냅니다. 겸손한 다가감과 겸허하고 친밀한 화목은 넘어진 이들, 상처받은 이들, 낙심한 이들을 일으켜 세워, 살려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살려내고 있습니까? 누구의 손을 잡아주고 계십니까? 더 힘껏 잡아 주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고의 사랑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고의 사랑을 받은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살리는 사랑’입니다.
4.
11절에서 사도 요한이 도전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이렇게까지, 새번역)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마땅하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고,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사랑받은 자는 사랑을 하는 게 당연하고, 가장 어울립니다. 멋있습니다. 사랑 크게 받아놓고 미움만 가득하면 어떻하겠습니까?
정리합니다. ① 사랑은 어렵습니다. ② 그래서 받아야 합니다. ③ 받으면 살리는 아름다운 사랑 할 수 있습니다. 사랑,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재조차 다 태워 버리는 뜨거운 사랑해서 사랑의 후회보다 사랑의 기쁨을 남기는 복된 인생의 길 걸어 가십시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