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3. 주일 설교. 해질녘에 읽는 요한일서 묵상 11: 믿음, 식별의 통로(요일3:1). 양은익 목사.

 

해질녘에 읽는 요한일서 묵상 11: 믿음, 식별의 통로(요일3:1)

1.
칼 세이건(Carl Sagan, 1934~1996)의 유명한 책 [코스모스]에 나온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ley, 1825~1895)의 문장입니다. ‘앎은 한정되어 있지만, 무지에는 끝이 없다. 지성에 관한한 우리는 설명이 불가능한 끝없는 무지의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그 섬을 조금씩이라도 넓혀 나가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우리가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으니 끊임없이 알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박할 수 없는 지당한 말입니다. 공자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모르는 것을 배우는 기쁨이 크니 계속 배우고, 익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배우고, 누구에게 배우고, 무엇을 배워야 할까? ‘세살 먹은 아이 말도 귀담아 들으라’는 속담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모든 이에게, 모르는 것은 다 배워야 합니다. 그 때 앎은 깊어지고, 넓어져서 고민의 바다 한복판에서도 식별력, 판단력을 가지고 담대하게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식별에 관한 말씀을 드렸는데, 식별의 바탕은 앎입니다. 아는 자만이 식별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요한 공동체를 향해 명확하고, 단호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 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요한일서에서 요한이 ‘안다’, 말하는 것들입니다. 태초부터 계신(2:13) 하나님 아버지(2:14)를 알고, 적 그리스도가 준동하는 마지막 때(2:18)인줄 알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3:16)을 알고, 진리에 속한 줄 알고(3:19),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알고(3:24), 하나님의 영을 알고(4:2),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알고(4:6), 죄를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죄를 사해 주심을 알고(1:9), 주님이 다시 오심을 알고(2:28), 그로 인해 세상이 미워할 것도 알고(2:13),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을 알고(3:16), 부활을 통해 생명과 영생을 주신 것을 안다(5:12,13).

요한의 일생을 관통하고 있는 앎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앎으로 살았고, 옳고 그름을 식별했고, 그에게 닥친 박해과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이 앎이 없었다면 요한은 버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한이 알고 있는 이 앎의 사건들은 우리도 알아야 하는 앎이고, 고백하고, 전해야 할 신앙의 사건들입니다. 아쉬운 것은 사람들은 이런 신앙적인 사건들을 알지 못하고, 받지 않고 있습니다. 난처합니다.

오늘 읽은 3:1절에 이 상황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자신들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아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얼마나 뼈아픈 말입니까? 요한은 지금 담담하게 쓰고 있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겪었던 수모와 오해, 박해와 고난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모르고, 하나님도 모릅니다. 보십시오. 부모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데, 자녀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 그만하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부모는 정신 차리라고 합니다. 아내는 아는데 남편은 모릅니다. 서로 다른 결론으로 갈등하고 힘들어 합니다.

3.
이런 일이 왜 일어나고 있습니까? 나는 알고 믿는데, 너는 왜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까? 이유가 있겠지요. 각자 처한 환경과 경험도 한 몫 하겠지만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빙산 그림입니다. 보이는 부분이 있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부분일뿐입니다.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세계가 있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세상은 보이는 세상만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더 광대하고, 신비하고, 우리의 판단과 이성과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세상, 영적인 세상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고, 존재입니다. 세상을 이해 할 때 보이는 세상만 봐서는 안됩니다.

이 두 세상은 다른 세상이기에 이해하는 방식도 다르고, 인식하는 수단도 다릅니다. 보이는 세상에서의 인식 수단은 이성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이성을 초월한 세상이기에 이성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 영적인 세상에서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이 인식 수단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 나를 초월하여 있는 세상에서는 이성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내 이성 보다 큰 이성을 무슨 수로 알 수 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음’이 앎의 길이고,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압니다. 믿음으로 밖에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질적인 차이가 있고, 넘을 수 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여 계십니다. 믿음으로 밖에 알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영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앎의 방식입니다. 유한한 사람이 포착 할 수 없는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신뢰하고 따라 가는 게 최고의 방법입니다. 다 알 수 없지만 믿고 신뢰하며 따라가게 되면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도 알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성만으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따를 수 없습니다. 이성이라는 자기 판단적인 앎의 방식을 내려 놓아야, 신앙의 세계를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신앙을 권하면 자주 듣는 말 있습니다. ‘믿지 못하겠어’. 맞는 말입니다. 보이는 세상의 인식 수단인 이성으로는 영적 세상의 일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역설같지만 알지 못하니 믿어야 합니다.  다 알고 믿는 것은 착각입니다. 다 알 수 없습니다. 믿어야 알 수 있고, 알기 위해서라도 믿어야 합니다. 신앙의 앎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을 크게 보시고, 믿음이 있을때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이유가 뭡니까?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고,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믿고 따른 그 ‘믿음’ 때문에 의롭게 여기신 것입니다.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매우 값진 선물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성의 영역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최대치입니다. 이성에 믿음이 덧입혀질 때 온전한 이성이 되서 보이지 않는 세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헤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도, 세상도 알 수 없습니다.

4.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 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말입니다. 보이는 세상에서는 타당한 말일수 있지만 믿음의 세계에서는 아닙니다.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 하셨다는 소식 듣고 자신은 눈으로 직접 봐야 믿겠다 그랬습니다. 백문불여일견입니다. 듣는 것은 소용없고, 봐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도마에게 한 마디 하십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요20:29). ‘듣고 믿는자가 복되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잘 듣는 게, 보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도 보고 믿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듣고 믿었고, 듣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들어야 하는 이유는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믿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전능자를 믿고 그 소리를 듣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여 믿음은 내 이성과 판단이 아닌 들음입니다. 롬10: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으니라’. 믿음은 보는 게 아니고 듣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주님이 틈 날때마다 하신 말씀입니다. 들어야 알 수 있기에 들으라 하신 것입니다. 그 들음에서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나를 넘어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통합니다.

좋은 식별은 내 머리와 이성이 아닌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으로 듣고, 알 때 옳고, 그름, 가야 할 길, 하나님의 뜻과 이끄심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식별의 순간, 판단의 순간이 앞으로도 계속 생길 것입니다. 그때마다 믿음의 세계로 깊게 들어가십시다. 말씀 깊게 듣고, 그 말씀에 자신의 삶을 조율해 갈 때 최고의 식별과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서 오는 식별의 은총, 누리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