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10. 주일 설교: 호산나, 다시 불러야 할 노래(막11:1~11), 양은익 목사, 종려주일

 

호산나, 다시 불러야 할 노래(막11:1~11)

1.
잠18:20.21절 말씀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열매가 사람의 배를 채워 주고, 그 입술에서 나오는 말의 결과로 만족하게 된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으니, 혀를 잘 쓰는 사람은 그 열매를 먹는다’(새번역) 말이 가진 힘을 과소 평가하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말과 글은 사소하지 않습니다. 말은 씨가 되서 내 말이 나를 만들고, 내 글이 너를 만듭니다.

눈 먼 사람이 팻말을 만들어서 도움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나 눈 먼 사람입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지나가던 사람이 보고 안된 마음에 팻말을 고쳐줬다고 합니다. ‘너무 멋진 날이에요. 그런데 난 그걸 볼 수가 없어요’. 대박이 터졌습니다. 단어 몇개로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말의 힘이 크다면 어떤 말과 문장을 품느냐는 중요합니다.

시대마다 시대를 나타내는 말이 있습니다. 시대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필요와 갈망이 시대어를 만듭니다. ‘잘 살아 보세’. 70년대의 시대어입니다. IMF 시절에는 ‘부자되세요’가 시대어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말을 품고 힘든 시절 살아냈습니다. 가훈을 새기고, 교훈을 만드는 것도 말이 가진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말과 문장과 말씀을 품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언어, 필요한 말이 있다면 어떤 말입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하는 이 시대의 시대어는 무엇이겠습니까? 말이 중요하고, 말이 나를 만들어 간다면 생각해 볼만 합니다.

2.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적진이나 마찬가지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환호합니다. 이 장면에서 나귀타고 오신다는 스가랴서 9:9절의 왕의 예언을 그들은 봤습니다. 자신들의 옷을 길에 깔고, 종려 나무 잎을 흔들고, 그 잎을 따 길에 뿌립니다. 누가 봐도 왕의 입성입니다. 푹풍이 밀려오는 폭풍 전야인데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모른채 들떠 있었고,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 주일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귀 탄 예수를 향해 소리 높여 왕이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소리 높여 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버립니다. 수제자라고 알려진 사람은 세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면서 처형 당합니다.

꿈에라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그때까지 외면하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주님을 보면서 짜릿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드디어 ‘거사’(擧事) 하시는 구나. 이 놈의 정권 이제 끝내자. 메시야가 오셨다. 무엇인가 이루어질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때 뒤 따르던 사람들이 외칩니다. 9, 10절 입니다. ‘호산나, 복되시도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들의 고단함과 갈망이 그대로 묻어 있는 외침이고, 기도고, 노래입니다.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일이 일어났지만, 이들이 외친 이 함성은 틀린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들의 외침 속에서 이 시대의 우리가 품어야 할 시대어를 봅니다. ‘호산나’라는 말 보셨습니까? 호산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소원하던 시대어입니다. ‘지금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Now save us, now save me). ‘부자 되세요’ 처럼 그들은 오매불망 그들을 조여 오는 압제로부터 구원받기를 갈망했기에 호산나를 말했고, 호산나를 기도했고, 호산나를 노래 했던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시여’, ‘다윗의 나라를 가져 오시는 이시여’, ‘호산나’,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아픔이 큰 만큼 이 소리도 컸을 것입니다.

3.
각설하고, 저는 이 ‘호산나’가 우리의 말과 기도와 찬양이 되는 시대의 단어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 말씀을 전합니다. 마음을 다한 간절한 ‘호산나’가 성도들의 마음과 입에서 수시로 터져 나오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호산나가 얼마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호산나를 얼마나 외치고 계십니까? 호산나가 필요없는 때가 없겠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은 호산나가 절실한 때입니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온 세계도 ‘호산나’가 필요합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군인들의 만행을 보십시오. 대학을 다니고, 톨스토이를 읽은 사람들입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예배를 드리고 나간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문명인들입니다. 우리처럼 BTS 좋아하고, 오징어 게임을 보는 젊은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한 일을 보면 2000년 전, 그보다 더 오래된 원시적 전쟁의 범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군인도 아닌 사람들을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합니다.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서 시신을 화장하는 차량을 가지고 다니면서 소각한다고 합니다. 세상은 이런 일을 다 보고 알고 있지만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년간의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고,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습니까? 과학도 필요하고, 이 모든 상황을 통제 할 수 있는 전문가도 필요하고, 정직하고 용기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거면 되는가? 할 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과학과 통치는 중요하지만 언제나 역부족입니다.

호산나가 필요없다 말하지 마십시다. 호산나는 지금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호산나의 주체는 과학도, 정치도 아닙니다. 푸틴의 인기가 러시아에서는 80%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이런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히틀러도 절대적인 국민의 인기와 지지를 업고 유태인을 죽였습니다.

4.
호산나의 주체, 우리를 구원해 주실 이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King of kings, 왕 중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그 왕께서 내 안에 입성 할 때,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백성 가운데 입성할 때 구원과 변화와 회복이 시작됩니다. 우리들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확신입니다.

이 확신을 마음에 품고, 구원이 필요할 때마다 ‘호산나’를 소리 높여 외쳐야 합니다. ‘주님, 구원하소서. 나를, 가정을, 세계를 구원하소서’ 구원이 절실한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와 찬양과 마음에 살아 있어야 할 시대의 단어는 호산나입니다.

11절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 보신 것으로 나옵니다. 주님은 여기서 충격을 받으십니다. 호산나의 소리를 듣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지만, 정작 그 소리로 넘쳐나야 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서는 ‘호산나’의 ‘호’자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 신자들 안에, ‘호산나’가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내 힘으로 세우는나라가 아닙니다. 나의 힘과 능력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간구하는 자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호산나의 기도가 있고, 호산나의 겸손함이 있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호산나가 중단되면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호산나는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고, 기도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 들려오고, 할 수 있는 힘이 없어 주저 앉을 때 마음 다해 ‘호산나’를 부르십시다. 일이 잘 풀릴때도 호산나로 기도하십시오.호산나가 있는 곳에 나의 왕이 계시고, 왕이 오십니다.

종려 주일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응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당신의 왕은 누구요?
누가 당신을 통치하고 있소!
당신은 누구의 말을 듣고 있소!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가 통치한다는 대답이 있기를 바랍니다. 종려 주일은 예수님의 왕 되심을 확인하는 주일입니다. 주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에도 왕으로 입성해야 합니다. 그 왕을 향하여 호산나를 부르는 기쁨과 경배가 오늘 아침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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