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읽는 요한일서 묵상 10: 식별의 사람(요일2:18~29)
1.
재일 교포 학자인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이라는 책에 보면 어머니가 부른 아리랑 가사가 나옵니다 ‘파란 밤 하늘은 별의 바다요, 사람의 마음은 고민의 바다요’. 재일 조선인으로 차별 받고 힘들 때마다 눈물 젖은 목소리로 부른 노래라고 합니다. 가사에 삶의 고단함과 곤란함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고민의 바다에 빠져 힘들어 하는 사람이 이 어머니뿐이었겠습니까?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매순간 고민하고 고뇌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람은 ‘고민하는 인간'(Homo patience)입니다.(빅터 E. 프랭클). 고민이 힘들지만 고민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갈 길을 찾게 됩니다. 오늘 말씀 제목에 보면 ‘식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식별은 고민하는 인간이 가지는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민이 있기에 식별로 삶의 문제를 판단하고, 갈 길을 정하게 됩니다. ‘아! 이건 아니구나, 이렇게 해야 겠구나’.
특별히 세속의 바다 한 가운데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식별은 없으면 안되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사는 대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매 순간 식별이 필요합니다. 자신과 세상과 타인을 보면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반성하고, 고민하고, 공부하고, 상상하는 ‘식별의 사람’이 될 때, 삶은 그만큼 깊어지고, 신앙인다워 질 수 있습니다.
개인이든 교회든 사회든 ‘고민하는 식별의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식별과 분별의 사람이 많아 질때 거짓과 불의가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동일한 실수를 반복해서 하지 않게 됩니다.
2.
오늘 요한일서의 본문에서 눈여겨 봐야 하는 사도 요한의 모습이 있습니다. 90된 노인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단호함, 명확한, 분별력, 식별력. 이런게 저에게 보였습니다. 지금 상황은 사도 요한의 입에서 마지막 때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혼란하고, 힘든 때입니다.
눈 닿는 곳 어디에나 요한과 요한 공동체의 성도들이 생명 처럼 여기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22절) 반대하는 ‘적그리스도’(antichrist)들이(18,22절) 교회를 파괴하고, 신앙을 위협하는, 누군가 나서서, 길을 보여주지 않으면 영지주의라고 알려진 고대의 뉴에이지 사상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하고, 예수님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노인 사도 요한이 나이 많다 하지 않고, 힘들다 하지 않고 나서게 됩니다. 혼란에 빠진 이들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다’(22절, 4:1). ‘미혹하는 자들이다’(26절). 요한의 선포가 얼마나 명쾌하고 주저함이 없는지 한번 들어 보십시오.
요일2: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
요일4:3.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대자의 영입니다. 여러분은 그 영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세상에 벌써 와 있습니다’
아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자신감입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만나고 만진바된 생명의 예수(요일1:1~2)가 있었기에 분명한 선을 그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짜다’. 분별과 식별이 필요한 상황에서 요한이 일어나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하는 말은 정리하면 이것입니다. ‘안다와 거하라’. 이 두 단어에 요한의 식별력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 계속 거하라, 그리스도와 함께하라’. ‘안다’(ginosko)는 단어가 요한일서에 21번이 나오고, ‘거하라’(meno, 머물다. 남아있다)는 요한일서에 24번에 나옵니다. 요한 사도가 이 두 단어에 집착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흔들릴 이유도 없고, 흔들리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 길이 진리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니 거짓된 미혹의 영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가진 믿음의 식별과 분별을 가지고 우물쭈물하지 않고, 머뭇거리지도 않고 아는 자, 거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분명함을 가지고 그들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3.
이런 정도의 식별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식별은 어느 정도십니까? 얼마나 깊은 식별을 위해 애쓰십니까? 요한 사도의 시대 못지 않게 지금도 분별과 식별이 절실하기에, 우리의 식별도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고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무엇이 옳음인지? 누가 진짜인지? 누가 가짜인지? 스스로는 옳다고 하는데, 그것이 진짜 옳은 것인지? 절대적인 진리는 절대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만은 절대 틀리지 않다는 사람들로 꽉차 있습니다. 식별을 통해 다시 마음을 잡아야 하고,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요한이 선물 처럼 준 두 단어가 필요합니다. 안다와 거하다(머물라). 알아야 하고, 생명되신 예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식별은 한 순간에 하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선택과 판단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식별은 벽돌 쌓는 것처럼 꾸준하게 쌓아나가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과 감정과 기분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나를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 식별의 삶입니다. 존재 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의 소리에 반응하는 매일의 순간들이 쌓여서 ‘식별하는 자’, 식별의 사람’이 됩니다.
식별을 통해 옳음을 알고, 하나님을 마음에 품는 순간 슬픔에서 기쁨으로, 적개심에서 환대로, 원망에서 감사로 , 정신없음에서 정신차림으로 바뀌는 영적인 희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탕자 보십시오. 탕자도 식별에 성공합니다. 돈 다 허비하고, 노숙 생활하다 비로서 알게 됩니다. 잘못했구나. 아버지께 가야겠구나. 가면 나를 받아 주시지 않겠는가? 가서 품꾼으로라도 써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그러면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환대합니다. 영적인 식별이 주는 은혜는 복되고 귀합니다.
4.
그리스도인의 식별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북극성입니다. 식별의 기준이고, 삶의 방향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2:27절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성령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실하셔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가시오’(공동번역). 성령께서 가르쳐서 식별하는 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식별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가지는 특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깊게 구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믿음의 징표가 식별입니다. 주님은 이 식별로 담대하고, 확신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변화하는 시대, 위험한 시대입니다. 일상의 삶에도, 신앙의 삶에도 식별의 지혜, 식별의 역량이 절실합니다. 식별의 복된 삶으로 충만한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오늘 아침 축복하고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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