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잠3:27~35)
1.
오늘 분문에 보면 잘하고 싶은 것, 잘해야 하는 게 나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3장 앞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을 인정하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져야 하는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는 오늘 본문에서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부족한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사기 치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관계 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지혜자의 관심을 우리 식으로 바꾸면 복지,공정과 음해,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해서 몸살을 앓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지혜자는 분명하게 맙말합니다.
“궁핍하고,부족한 사람은 외면하지 말고 도와라. 평범한 이웃은 귀하고 존엄하니 음해하지 말라. 나쁜 사람은 부러워하지 말라. 부러워하면 너도 망가진다”.
(1) 27절.28절 보십시오. ‘도움을 청하는 손을 뿌리치지 말고 도와줄 힘만 있으면 망설이지 마라. 있으면서도 내일 줄테니 다시 오게 하며 이웃을 돌려보내지 마라’(공동) 대단한 말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도울 힘이 있으면 무시하지 말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줘야 할 게 꼭 돈일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도 줄 수 있고, 위로, 봉사 다 줄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도우라는 것입니다.
‘자립은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마25:40)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한 것이 지혜입니다.
(2) 29.30절 입니다. ‘너를 믿고 사는 이웃은 해칠 생각을 아예 마라. 너를 해치지도 않는 사람에게 공연한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된다’. 이래야 되는 이유는 사람이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있는 이들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동등하고, 귀한 존재들입니다.
만인만색(萬人萬色), 사람은 저마다 다릅니다. 다르면 다르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근데 우리는 다르면 못 봐주고, 그 다름에 대해 시비를 겁니다. 공격해서 해칠려고 합니다. 음모를 꾸미고, 음해합니다. 그러면 평화가 깨지고, 전쟁이 일어납니다. 포스턴 한장 보십시오. 여기에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양궁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선수입니다. 수고해서 3관왕이 됐는데, 시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여자 선수 머리가 남자 머리냐? 혹시 페미니스트아니냐? 본인은 이 머리가 편해서 그렇게 했다는데도 ‘남자를 혐오하는 여성주의자다’, 그러면서 댓글 달고 공격하니까 급기야 저런 포스트 까지 만들어서 대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핏보면 이대남(20대 남성)과 이대녀(20대 여성)의 싸움 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일들이 지금은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어디를 가나 수군수군이고, 이것으로 상처를 주고, 통쾌해 합니다. 가학성입니다. 30절의 표현처럼 공연한 시비고, 폭력입니다. 지혜자는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3) 31절 입니다. ‘사기치는 자들을 부러워하여 그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마라’(공동). 사기쳐서 잘 사는 사람들 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니다’. 그래야 되는데 속으로는 부러워합니다. 지혜자는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명언이 있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맞습니다. 부러우면 집니다. 편법써서 얻는 것을 부러워하고, 정당화하면 사회 전체가 지는 것입니다. 부러우면 따라 하게 되고, 따라하다 보면 악해집니다. 그래서 지혜자가 말하는 것입니다. ‘포학한 자, 사기 치는 자, 불의한 자’는 부러워하지 말라’. 왜 그렇습니까?
32절.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33절.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34절 하나님이 비웃으시고 35절. 그의 잘됨은 하나님의 의해서 수치로 종결될 것이니 공연히 그들과 가까이 하면서 잘못된 것 배울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의와 부정을 부러워하면 너와 나, 사회, 다 망가집니다. 이런 판단력(지혜)을 사람들이 가져야 합니다. 시대가 요구하고 있고, 우리 삶에 필요한 지혜입니다.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 교우들은 다 가지면 좋겠습니다.
3.
칼 막스의 묘비에 적혀 있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는 안다고 저절로 일어나는 게 아니고, 실천이 담보될 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 신앙인들을 통해 실천되고 보여져야 됩니다. 어디서 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까? 관계의 문제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습니다. 잠4:23에서 마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그것이 바로 복된 삶의 샘이다’.
도움을 주는 것도, 시비를 걸지 않는 것도, 악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마음을 지켜야 할 수 있습니다. 지켜야 할 마음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부드러운 마음, 연민의 마음, 나만 생각하지 않는 좋은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을 지켜내야 합니다. 이 마음에 대해서 바울이 말한 게 있습니다.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고전12:26.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 공감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보입니다. 왜 힘든지, 왜 우는지, 왜 음해하는지, 왜 불의한지가 보여서 아파하고, 연민하고, 안타까워 할 수 있습니다. 공감이 없으면 사람은 고립됩니다. 자기 성에 갖혀서 봐야 할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선만 계속 긋습니다. 우리 편, 너네 편, 너는 갑, 나는 을, 너는 기득권자, 나는 피해자. 선을 그으면 그을수록 불행해 진다는 게 역사의 교훈인데 계속 긋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지혜자의 권고가 만들어 질 수가 없습니다. 지혜자의 권고가 무엇이었습니까? ‘도울 수 있다면 도와라. 자기 살려고 남을 해치지 말라. 부정한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 부러워하지 말라. 정의로워라’.
자신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시대를 관통하는 살아있는 판단이고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제는 정말 이렇게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귀한 소명과 책임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주일 아침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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