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b~10)
바울은 세상과 하나님 앞에서 바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보여지는 바울과 하나님 안에서 바울이 인식하는 모습은 다릅니다. 역설적인 두 현실은 모두 바울에게 맞닥뜨린 실제입니다. 세상의 눈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비춰 봅니다. 우리는 이 둘의 세계관에서 어떤 모습을 쫓으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고백하는지요? 바울의 고백은 성도의 삶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모두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된 자입니다.
바울은 사도권을 의심받았고, 교회를 간교하게 꾀고 속이는 자라고 비난을 받았습니다(고후 12:11-16). “내가 자랑함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으나 이것은 여러분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나는 당연히 여러분에게 칭찬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내가 비록 보잘 것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 위대하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습니다”(고후 12:11 현대인의 성경). 어쨌든 내가 여러분에게 짐을 지운 일이 없어도 간교하게 속임수로 여러분을 착취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고후 12:16,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도 사람들로부터 속이는 자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를 찾아가서 이야기합니다.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마 27:63-64).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하며 유대교의 유대인을 꾀하고,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교회를 불러내는 속이는 자로 여김을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리시며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전하심으로 이단의 괴수로, 속이는 자로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유대교의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는 형벌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복음을 진리로 보지 못하고 거짓으로 보았습니다. 철학과 전통의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기 전에는 누구도 복음을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2.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무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 전통의 종교적 배경이 든든했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이 모든 것 버리고 이름없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정착된 삶터와 생업이 없는 여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며 주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유명하다는 헬라어 원문 에피기노스코메노이(ἐπιγινωσκόμενοι)는 ‘하나님께 알려진 자’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르고 무시하는 바울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보다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3.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는 자입니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버려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 14:19-20). 환난과 심한 고난에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사망의 위협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건지심과 부활신앙으로 충만했습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8-10).
4.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자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그 안에 영생의 소망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 있었습니다(6:4-5). 사람들은 징계를 받는 사람으로 바울을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징계가 없고 세상에서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안에 하나님은 더욱더 충만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땅에서 생명을 취하실 분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알고 기다렸습니다(딤후 4:6-8).
5.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자신의 죄와 싸우며, 육체의 연약함으로 고통을 받았고, 핍박으로 도망 다니며 고생하고, 교회를 향한 책임으로 걱정과 눈물지었던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매맞고 갇혀도 찬양을 부릅니다. 교회들을 보며 기뻐하고, 로마로 끌려가면서 감사를 올려 드리고, 옥중에도 기뻐합니다. 그리고 자신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살전 5:16-18). 고난과 근심 중에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6.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작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금과 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킵니다(행 3:6). 돈보다 더 귀한 예수로 치유와 구원을 안겨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주셨습니다. 예수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로마황제 숭상을 거부하고 신앙을 지킴으로 가난한 서머나 교회에게 하나님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 2:9a). 반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부자이지만 주님의 은혜가 식고 세상의 가치관과 혼합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나님은 가난하다고 책망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3:17). 부하고 가난은 물질의 있고 없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일하심의 있고 없음이었습니다.
7.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 가진 자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보기엔 정말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집도 가족도 고정된 직장과 삶터 그리고 건강과 안전 등 어느 것 하나 보장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 시민권을 가졌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변화시키실 영광의 몸을 갖게 되었습니다(빌 3:20-21).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사람인 것입니다(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 34).
바울의 두 실존, 사람 앞에서의 바울의 모습은 확연하게 눈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은 마음과 영혼의 눈이 필요합니다. 확신입니다. 그렇다고 관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볼 수 참된 현실이며 성도의 신앙고백이며 삶입니다.
여러분은 이 고백을 어떻게 받으십니까? 혹시 바울의 고백이 여전히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만 다가 오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응답으로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며 믿음으로 나아가면, 가까운 때에 이 땅에서 주실 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거나 몰라주지만 언젠가는 알아주고 칭찬해 주고, 고난으로 힘들지만 언젠가는 이 고통이 사라지고, 걱정거리가 평탄하게 해결되어 편안하게 되고, 현재는 가난하지만 부자가 되는 기대를 품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렇다만 아직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시선에 멈추어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스스로에게, 예수님을 믿으니, 예수님 안에서 ‘나는 참되고, 유명하고, 살아 있으며, 부활의 생명이 있고, 힘들어도 항상 기뻐하고, 가난해도 부자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다독이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혹은 다른 사람에게 믿음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듯, 슬퍼도 울지 않고 웃으려고 애쓰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발견하실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힘들고 슬퍼지며 세상과 다르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절감하게 됩니다.
세상의 시선과 하나님 나라의 시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이 땅에서의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부림으로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날마다 나를 내려놓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고후 6:1).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임을 알 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내 영혼이 곤고하고 가련한 자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무엇을 좀 가졌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이 나오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더 깊이 영혼 속에 심겨지고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나를 만나는 삶이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통로이며 은혜입니다.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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