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1. 주일 설교. 마가복음 강해 36: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8:11~21).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강해 36: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8:11~21)

1.
오늘 본문은 사천명을 먹이신 후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사건의 배경은 서로 다릅니다. 하나는 달마누다 지방이고, 다른 하나는 벳새다로 가는 배 안입니다. 달마누다 지방에서는 바리새인들을 만나고, 배 안에서는 제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하는 주님은 상당히 답답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2절. 바리새인들을 보면서는 ‘깊이 탄식’(12절) 하시고, 17절, 21절. 제자들을 보면서는 ‘아직도’ 하십니다. 알만한데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해 하시는 것입니다. 알아듣지 못하면 뭐가 터집니까? 속이 터집니다.

사건을 보시면 알겠지만 바리새인과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주님되심의 표적과 기적이 있었는데도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다른 표적, 다른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고 있고, 제자들은 오병이어, 7병이어의 사건을 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먹을거에만 집중하는 답답한 모습,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바리새인들의 깨닫지 못함
11절.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여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이 사람들이 표적을 다 보았지만 인정하지 않고 다른 증거를 대 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어떤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습니까? 그들이 가진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는한 어떤 표적을 보여줘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고정관념과 생각의 완고함. 깨닫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자기만의 생각과 판단에 사로 잡히면 나와 너는 통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너가 통하지 않으면 대화는 불가능하고, 어떤 옳음과 진실도 들어 갈수가 없습니다. 12절에 보면 주님은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탄식만 하고 그대로 배타고 떠나버리십니다.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으면 설득도 해보고 그랬을텐데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2) 제자들의 깨닫지 못함.
14절부터는 제자들의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의 힐난을 뒤로 하고 배 타고 가는데 이번에는 제자들이 속을 썩입니다. 배타고 가는데 배에 떡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배 탈 때 떡 갖고 오는 걸 잊어 버렸습니다. 배 안에 주님 일행만 13명인데 떡 하나 가지고는 턱도 없습니다. 이걸 알고 제자들이 수군 거리기 시작합니다. ‘이번에 떡 당번 누구야? 베드로야, 요한이야’ 당번이 누군데 떡도 안 가지고 와서 굶게해’ 잘못하다가는 큰 싸움 날 판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는 참 한심한 상황입니다.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바리새인들이 공격해 들어오고, 헤롯이 공격해 들어오는 시기인데 이 친구들은 떡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15절 보십시오.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나쁜 영향력, 그들의 힘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먹는 것 가지고 옥신각신 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16절.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동문서답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이없는 장면입니까?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오고, 배타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긴박한 시간인데도 떡 갖고 옥신각신하고 있습니다. 한개 밖에 없으면 내려서 먹으면 되고, 그것도 안되면 떡 잘 만드시는 주님이 함께하시는데 걱정할게 뭐가 있습니까? 지금것 본게 급식 사건인데 하나도 안 본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질문으로 이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때 몇 광주리 남았는가? 제자들은 12광주리와 7광주리 남았다고 정확하게 대답합니다. 제자들은 수군거리기만 했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둔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고 있지만 주님도 몰랐고, 주님이 하시는 일도 잘 몰랐습니다.

17절에 보면 주님이 짚어 주신 네 단어 나오는데 잘 봐야 합니다.수군거림, 알지 못함, 깨닫지 못함, 둔한 마음. 제자들읠 상태입니다. 벗어나야 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잘 봐야 하고, 잘 들어야 하고,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18절 보십시오. 예레미야서 5:21의 말씀이 나오는데 주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둔감한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스라엘이 왜 망했습니까? 보이고, 들리는데도 보지 않고, 듣지 않다가 망합니다. 너희들은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예수님) 한 일 눈 부릅뜨고 보고, 내가 한 말 귀 활짝 열고 들어,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마지막은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통렬한 질문으로 끝납니다. 21절입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무슨 말입니까? ‘이제는’ 알고,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아직도’와 ‘이제도’의 차이, 무시하면 안됩니다. 불행과 행복의 차이고, 멸망과 구원의 차이입니다. ‘이제도’로 가면 살지만 ‘아직도’에 머물면 장사 없습니다. 이제는 깨달아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당부로 알고, 우리도 ‘받아내야’ 합니다.

2.
뒤늦은 후회라는 아픔을 막기 위해서라도 깨달음은 절실합니다.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요? 이론적으로는 간단합니다. 열려야 합니다. 아니, 열어야 합니다. 닫혀 있으면 깨달음은 물건너갑니다. 한번 닫히면 잘 안 열리는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시작되고, 후회를 막을 수 있습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틈을 내야 합니다. 틈은 사이고, 벌어짐이고, 통로입니다. 틈을 통해 나를 열어야 합니다. 틈이 없고, 틈을 주지 않으면 질식해서 죽습니다.

김지하의 시 한 대목입니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 틈 때문. 사람은 틈. 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김지하, 틈, 부분)

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는 말, 잘 받으면 좋겠습니다. 새 일을 위해 열어야 할 틈,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영성의 틈, 지성의 틈, 감성의 틈입니다. 영성. 지성. 감성은 우리를 깨닫게 만드는 중요한 축인데, 이 틈에 빛을 가져다 줘야 깨닫는 일이 시작됩니다.

(1) 영성의 틈.
영성의 틈은 성령을 받아들이는 틈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과 경험으로 꽉 차 있던 영혼에 ‘내 판단이 다가 아니구나. 내 생각이 다가 아니구나’ 하면서 거룩한 분께, 하나님께, 성령께 틈을 줄 때 새로운 인식과 사고와 깨달음이 올 수 있습니다.

시편 27:9절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당신께서 지금껏 내 곁에 계셨음을 온전히 체험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나를 구원하시는 당신의 능력을 똑똑히 보게 하소서’ 하나님께 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깨달음이고, 근본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을 막지 말고 틈을 내십시오. 새로운 깨달음이 옵니다. ‘성령이여 나를 인도하사 내 눈을 밝게 하시고, 내 귀를 활짝 여사, 주의 뜻, 주의 마음 알게 하소서’ 매일 드리는 여러분들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지성의 틈
두 번째 틈은 지성의 틈입니다. 지성은 판단하고, 행하는 지적인 능력입니다. 지성이 잘못되면 후회 막급하게 됩니다. 스피노자가 한 말이 있습니다. ‘비웃거나 한탄하거나 혐오하지 말고 오직 이해하라’ 제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과 판단의 기준은 진리,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 지성의 기준이고, 우리를 깨닫게 만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닫지 말고 틈을 내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좋은 깨달음, 좋은 판단이 필요하면 말씀을 무시하지 말고, 말씀을 받아 들이십시오. 지혜를 줄 것이고, 그 지혜가 여러분들의 고단한 일상, 뜻대로 안되는 일상을 살려낼 겁니다. 잠4:6. 지혜를 버리지 말아라 그것이 너를 지켜 줄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보호하여 줄 것이다.(새번역)

(3) 감성의 틈
세번째 틈은 감성의 틈입니다. 감성과 감정은 깨달음의 중요한 틈입니다. 기분 나쁘고, 상해 보십시오. 쌓아 놓았던 영성, 지성 한 순간에 날려 보냅니다. 감성에는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강한 독성이 숨어 있습니다. 잘 다스려야 됩니다.

깨달음을 위해 필요한 중요한 감성있습니다. 겸손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자신의 알지 못함에 대해서, 자신의 철 없음에 대해서 깨어 있을 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깨달음을 막는 치명적인 감성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바로 교만입니다. 자신들이 최고라고 하는 교만이 진리와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교만은 특권의식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 사회가 아직 이런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면 ‘판단력’이 부족한 사회, ‘깨닫지’ 못한 사회가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나옵니다. 엘리 제사장 나쁜 사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됩니까? 딸이 아니라 아들들 기억나십니까? 자격도 없으면서 제사장됐던 두 아들의 특권의식 때문에 엘리 제사장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아버지가 존경받는 제사장이니까 이 정도는 누려도 되겠지?하는 특권 의식이 그들의 눈, 판단을 멀게 한 것입니다. 교만을 겸손으로 바꿔야 됩니다. 그래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과 진리의 말씀과 겸손의 감성으로 틈을 내십시오. 그 틈이 온전한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깨닫는 자로 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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