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8. 주일 설교. 마가복음 강해 37: Begin Again (막8:22~26).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강해 37: Begin Again(막8:22~26)

1.
Begin Again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많이 듣는 단어라 영어로 그냥 썼습니다. 제목 안에 오늘 본문의 뜻이 오롯이 들어있으니까 주님의 마음으로 알고 받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요즘 뭐하세요? 라고 묻는 문정희 시인의 시가 있는데 한 대목 읽고 시작하겠습니다. ‘누구나 다니는 길을 다니고, 부자들보다 더 많이 돈을 생각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데 살아 있지 않아요. 화를 내며 생을 소모하고 있답니다. 몇가지 물건을 갖추기 위해 실은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어요. 충혈된 눈알로 터무니없이 좌우를 살피며 가도 가도 아는 길을 가고 있어요’(문정희, 요즘 뭐하세요? 부분)

요즘 뭐하니! 물으니까 돌아온 대답입니다. 누구나 가는 길 자신도 다니고 있고, 충혈된 눈으로 가는 길 매일 똑같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길을 가는지는 시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다른 길도 있고, 다른 세상도 있는데 많을 것을 뺏기는데도 그 길만 고집하면서 사는 게 지금 우리의 모습 아니냐! 하는 시인의 일갈(一喝) 입니다.

저도 물어보겠습니다. ‘요즘 뭐하세요’ 좋은 대답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2.
오늘 본문, 어떻게 읽으셨는지 모르겠만, 다른 길, 다른 세상이 있으니, 눈 환히 뜨고 보라는 주님의 도전이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기 보십시오. 보지 못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안수 하심(touch)으로 보는 사람이 됩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 한번도 가지 않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세상,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새로웠겠습니까? 물론 이 사람은 단박에 새 길로 들어선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다가 나중에 가서야 환하게 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환하게 보고, 새 길 가면 좋겠지만 사람은 미련도 많고, 철도 늦게 들기 때문에 새 길 가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오늘 사건의 자초지종을 한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 뱃새다에 도착하셨는데, 뱃새다 오기 전에 배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자들 때문에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셨습니다. 알만한 때가 됐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때문에 탄식하시다가 벳새다에 도착하신 겁니다.

그 상태에서 ‘보지 못하는 이’를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데리고 와서 보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귀먹고 말 못하는 이를 고쳤으면 보지 못하는 이도 보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온 겁니다. 감사하게도 주님이 반응해 주십니다. 안수하므로 고쳐 주시는 데, 처음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어떤 병자든 한번에 해결하시는데 이번에는 한번이 아니고, 두번에 나눠서 고치십니다.

첫번째 안수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보이긴 보이는데 희미하게 보입니다. 사람들이 꼭 나무들 걸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한번 더 Touch 하십니다. 25절 보십시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두 번째 안수에서 완벽하게 보게된 겁니다.

왜 이렇게 하신 겁니까? 한번으로도 충분히 될 일인데 두 번에 걸쳐서 한 이유? 제자들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은 ‘보지 못하는 이’를 치유하면서 제자들을 향한 액션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어떤 제자들입니까? 희미하게 보는 제자들,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제자들에게 눈먼 이를 고치면서 도전 하는 겁니다.

‘눈 활짝 떠 확실하게 보라. 이게 너희들의 모습이다’ 8:29절에 보면 유명한 주님의 질문이 나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내가 누구냐?’ 온전하게 알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르는 자들의 소명은 따르는 이를 온전히 아는 것, 밝게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알지 못하면 헛발질 할 수 밖에 없는데, 주님은 헛발질 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Begin Again. 다시 시작하라’ 이게 두 번 안수에 담긴 주님의 마음이고, 주님의 뜻입니다.

3.
25절에 나오는 ‘다시’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어떤 눈입니까? 사람인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이는 잘 안보이는 눈인데, 바로 그 눈에 ‘다시 안수해서’ 밝게 해 주셨습니다. 속터지게 하는 제자들이 무너지지 않고 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다시’ 때문입니다. 주님은 무너질 때 마다 ‘다시’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이 ‘다시’라는 말을 우리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만 ‘다시’의 기회를 주신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다시’의 기회를 주셨고, 앞으로도 주실텐데 다시를 가진 자의 삶을 우리도 살아내야 합니다.

‘다시’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끔찍하지 않겠습니까? 다시가 필요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는 우리 안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일어날 수 있고, 너도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다시 시작하면 살아나지만,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고, ‘다시’ 살려내는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단어들 보십시오. 전부 ‘다시’, 영어로 하면 Re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회개repentance-뉘우쳐서 새 마음 갖는 것, 중생,born again-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부활resurrection-다시 살아나는 것, 재림come again, return -주님 다시 오시는 것.

‘다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든 ‘다시’ 시작하고, ‘다시’ 기회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 ‘다시’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 활짝 떠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다시’라는 넉넉함과 인내와 용서가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의 힘을 주시는 성령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4.
오늘 본문에 보면 ‘다시’ 보게되는 과정이 나오는데, 이 장면 잘 보게 되면 ‘다시’ 시작하는 이들이 가져야 할 마음과 조건을 볼 수 있습니다.

(1) 동행하라(22절)
첫번째 조건은 동행입니다. 함께 하려는 마음이 살아 있어야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이 만들어 집니다. 동행의 마음이 ‘1’도 없으면 ‘다시 시작하는 것은’ 힘들어 집니다. 22절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 주시기를 간청하였다(새번역). 눈먼 사람을 누가 데려옵니까? ‘사람들이’ 데려 옵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주님께 와서 도와 달라, 보게 해달라 간청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한 영혼을 위해서 기꺼이 동행 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희생과 사랑으로 함께 동행해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의 동행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어떤 시작이든 시작 할 때는 동행하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지금 ‘동행해야’ 할 사람이 누군가 살펴보시고 보이면 ‘화끈하게’ 동행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시작’ 할 수 있습니다.

(2) 익숙한 것보다 주님을 의지하라(23절 上)
다시 시작할 때 필요한 두 번째 조건은 23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주님께서 마을 밖으로 나가신 이유는 복합적입니다. 하지만 맹인의 입장에서 보면 마을 밖은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곳입니다. 마을 안에서는 지팡이를 짚으면서 그럭저럭 다닐 수 있었겠지만 마을 밖은 낯설고, 위험합니다. 가기 싫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손 꼭잡고 마을 밖으로 가십니다. 의미있는 모습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새길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불안이 ‘다시 시작하는 것’을 방해하는데, 이 때 필요한 것이 주님에 대한 깊은 의지와 믿음입니다. 다시 시작할 때는 익숙한 것보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손잡아 주신다는 ‘아이’ 같은 믿음. 다시 시작할 일이 있는 분들은 이 믿음 꼭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는 일에 담대한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3) 감정을 주의하라(23절 中)
세번째 조건은 감정의 문제입니다. 어떤 다시 시작이든, 다시 시작할 때는 감정적으로 취약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지배하기 쉬운 때이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감정에 주의하고, 감정을 잘 다스려야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23절 중간에 보십시오. 낯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하신 주님의 행동이 나옵니다. 손 꼭 잡고 가시니까 대단한 기대를 하고 갔을 것 같은데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두 눈에 침을 뱉어 버리십니다. 치유 과정에 나온 행동이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여러분이 당사자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에 침을 바르는 시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직접 침을 뱉는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근데 주님은 이 사람의 가장 아픈 곳, 가장 열등한 곳인 안 보이는 눈에 ‘퉤’하고 침을 뱉어 버렸습니다. 갑자기 당하는 일에 기분 좋을리가 있었겠습니까?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당히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인데, 떠나지 않습니다. 떠나지 않을 뿐 아니라 항의도 하지 않습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쉬운 순간인데 참아냅니다. 감정은 다시 시작할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통과 의례같은 복병입니다. 다시 시작하려면 자존심 상하는 일 많고, 속 상한 일들이 무궁무진 합니다. 이 순간을 믿음으로, 통 큼으로 견뎌내야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감정에 지면 마음이 닫히지만, 이겨내면 마음이 열립니다. 마음이 열리면 열린 만큼 기회가 많아집니다.

(4) 마음을 열어라(23절 下~25절)
이 사람 보십시오. 부정적인 감정을 이기니까 주님과 계속해서 얘기합니다. 사람은 감정이 상하면? 입 다물고 말 안합니다. 근데 이 사람 보십시오. 모욕적인 감정을 이겨내니까 예수님과 주고받고 합니다.

침 뱉고 안수한 후에 주님 물어 보십니다. ‘뭐가 보이니? 보이는 게 있니?’ ‘예 보입니다. 근데 사람이 나무 같은 것들로 보입니다’ ‘그래 다시 안수할게’ 그래서 환히 보게 된 것입니다. 다시 시작할 때는 마음 열고 하는 한 마디가 중요합니다. 막힐수록 마음 열고 대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시작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기도로 대화하고, 사람에게는 마음으로 대화하고. 그래야 Begin Again이 일어납니다.

다시 시작의 네 가지 조건 ① 동행하라 ② 익숙한 것 보다 주님을 의지하라 ③ 감정을 주의하라 ④ 마음을 열라. 담으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잠24:16)고 했습니다. 다시 일어나는 의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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