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25. 주일 설교. 마가복음 강해 35: 안아주고, 밀어내고(막8:1~10).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강해 35: 안아주고, 밀어내고 (막8:1~10)

1.
제목이 안아주고, 밀어내고 이렇게 되 있습니다. 이렇게 바꿔도 상관 없습니다. 손잡고, 손놓고/ 함께하고, 따로하고/ 좋아하고, 미워하고. 쉽게 넘겨서는 안되는 대비되는 말들의 조합입니다. 우리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묵직한 단어입니다. 단어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손놓았’다면 ‘손잡는’ 쪽으로, ‘밀어냈다’면 ‘안아주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제의 시급성을 알고 오늘 말씀을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 두 모습이 그대로 나오고 있습니다. ‘안아주는 이’가 나오고, ‘밀어내는 이’가 나옵니다. 안아주려고 하는 이는 예수님이고, 안아주지 않고 밀어내려고 하는 이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그 사람들’과 손잡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보려고 광야까지 온 사람들, 하지만 배고픈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먹이고 싶은데, 제자들은 시큰둥합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길 가다 쓰러지면 어떻게하느냐?’ 먹여서 보내자는 것입니다. ‘이게 내 마음이니 너희들도 어떻게 해 봐라!’ 하지만 제자들은 단박에 거절합니다. 4절 보십시오. ‘이 빈들에서,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이 모든 사람이 먹을 빵을 장만할 수 있겠습니까?’(새번역) 이 정도되면 제자들의 건망증이 보통이 아닙니다. 오병이어 때랑 다른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도 먹였으면 지금도 먹일 수 있는건데, 먹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억을 못한 게 아니라 먹이는 게 싫었던 것입니다. 싫은 이유는 사람때문입니다. 먹어야 하는 시람들이 이번에는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인데, 이게 싫었던 것입니다.

1절 보십시오.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그 무렵’이라는 말은 7장의 데가볼리 지방에서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고칠 무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여전히 데가볼리의 이방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 지역에 있던 이방 사람들이 주님께 몰려온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과 똑같아 보이지만 모인 사람이 다릅니다.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싫은 사람들이 온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배고픈 것도 알고, 힘든 것도 알지만 ‘안아주기’ 싫었던 겁니다. 이게 제자들이 넘지 못한 한계입니다. 뭔지도 모르면서 받아들인 유대 선민의식, 특수주의로 견고한 담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배제해야 하고, 혐오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서운 현실이고,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광야에서 배고픈데 무슨 이방인, 유대인 따집니까? 근데, 그래도 따지는 게 사람이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편파성이고, 굳어짐입니다.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을까요? 예수님도 유대인 아닙니까? 근데도 보십시오. 제자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오병이어 때처럼 가지고 있는 떡과 생선으로 배고픈 이방인들 4천명을 먹이십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한 단어로 나옵니다. 2절입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 마음이 주님에게는 있었고, 제자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아주 큰 차이입니다. 이 마음, 잘 봐야 됩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꼭 있어야 하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이 단어, 오늘 아침 여러분들의 마음에 꼭 담아 내십시오. 많은 것들이 달라 질 수 있는 소중한 단어고, 마음입니다.

2.
2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알려 주십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 있습니다. ‘I have compassion on the crowd’ Compassion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공감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나몰라 하지 않고, 함께(com)+ 아파하는 것(passion). 지금 주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프다는 겁니다. 공감이라는 단어에 empathy라는 말도 있습니다. 다른 이의 감정(pathy)+ 안으로(em) 들어가는 게 ‘공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파하는 이 있으면 함께 아파하고, 함께 힘들어하고. 어느 정도로 아픈가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쌍히 여기다’는 단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스쁠락크니조마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스쁠락큰이라는 명사의 동사형입니다. 내장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로 아파하셨는가? ‘애간장이 탈’ 정도로, 창자와 간이 탈 정도로 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그들을 보셨던 것입니다. 공감은 주님이 가지셨던 마음이고, 마음의 정서입니다. 이 마음으로 아픈자들, 배고픈자들, 소외된자들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공감을 받아내서 우리의 기본 마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태주 시인이 공감의 마음을 노래한 시 있지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입니다. 한번 대충보고 밀어내고, 판단하고, 미워하지 말고 자세하게, 오래보라는 것입니다. 공감의 마음을 가지고 보게되면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쁜 구석, 사랑스러운 구석, 이해할만한 구석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3.
긴 말 안드려도 다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공감과 공감의 정서가 절실한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만, 우리 편만 있으면 살 수 없습니다. 함께하려는 마음,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정도 나라도 살 수 있습니다. 공감이 사라지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함께 아파하며 하나 되려고 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감은 어리석은 마음도 아니고, 불가능한 마음도 아닙니다. 서로가 달라도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신학생들을 놓고 선한 사마리아인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길에 쓰러진 사람을 어느 정도로 돕는가? 하는 실험을 했는데, 시간 여유가 있는 신학생은 63%, 시간 여유가 없는 신학생은 10%만 쓰러진 사람을 돕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사람의 행동은 성품이 아니라 상황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공감도 비슷할 겁니다. 공감 좋지요!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받고. 근데 수 많은 상황이 공감을 막아 버립니다. 편견이라는 상황, 진영이라는 상황, 싫어한다는 상황, 여유가 없다는 상황. 이런 상황들이 공감을 막아 버립니다. 공감은 나와 너를 연결하는 아름다운 순간인데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려내면 좋겠습니다. 공감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애써주십시오.

토마스 아 켐피스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한 말입니다. ‘그대의 골방을 성실히 지켜라. 그러면 그 골방이 그대를 지켜 주리라’ 기도의 골방이겠지요. 자신을 성찰하는 골방이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인데, 여기서 함께할 수 있는 소중한 마음이 만들어집니다. 은혜 안에서 누리는 감사와 찬미가 공감의 연료입니다. 감사와 찬미로 마음이 넓어지고, 밝아지면 공감의 마음이 생깁니다.

고통과 아픔이 있는 한 공감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공감이 필요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의 아픔을 함께 할 때 진정한 공동체, 함께 하는 가정, 교회,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이 마음 배우셔서 공감의 사람이 되십시오. 귀한 일들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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