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18 주일 설교. 마가복음 강해 34: 다른 삶의 가능성(막7:31~37).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강해 34: 다른 삶의 가능성(막7:31~37)

1.
아픈 글입니다. 황지우 시인의 글 한 대목 읽고 시작하겠습니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러진 채 모두 떠났다

아무도 사랑해 본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황지우, 뼈아픈 후회, 부분)

부릅뜨고 봐야 할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뼈아픈 후회라는 말이 정말 뼈아프게 들려지는데 이런 후회는 없으면 좋겠습니다. 시인은 사랑에 대한 뼈아픈 후회를 하고 있지만, 뼈아픈 후회가 어디 사랑뿐이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수 많은 뼈아픈 후회들이 있어서 우리를 뼈아프게 만들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뼈 아픈게 뭐가 있습십니까? 없다면 축하 드립니다. 하지만 있다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더는 뼈아픈 후회를 하지 않도록 애쓰시고, 만회하시고, 줄여 나가시기 바랍니다. 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삶의 과제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되 있는데 ‘뼈아픈 후회’에서 벗어나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아내야 합니다. 다른 삶을 찾지 않고 고착되 있으면 새로운 뼈아픔은 계속 생기게 될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은 다른 삶, 새로운 삶을 찾아내는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다른 삶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지던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게되는 감격적인 사건을 오늘 보고 있습니다. 다른 삶,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큰 울림을 가지고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표면적으로는 데가볼리 지역에 사는 한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는 사건이지만 마가는 이 사건을 통해서 귀도 있고, 입도 있지만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잘 듣고 있는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가? 귀먹은 채로 있지말고 귀 열고, 혀 풀어서 새로운 삶, 다른 삶을 살아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33절. 34절에 치유 과정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 데리고 와서 안수해 주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주님 어떻게 하십니까? 조용한 대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양 귀에 넣고, 손에 침을 뱉어 혀에 대 주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탄식 하신 후에 소리 치십니다. ‘에바다’ ‘열려라’ 귀도 열리고, 말도 열리고.

이 사람이 듣지는 못하지만 볼 수는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탄식을 하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주님의 이런 몸짓을 보면서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이거 진심이구나. 나 처럼 안타까워하고, 아파하는구나. 그리고 그 순간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에바다. 열려라. 어떻게 됐습니까?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만이 하시는 상징적인 행동이니까 흉내 낼 필요 없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받아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① 하나는 탄식의 마음이고, ② 다른 하나는 마음의 열림입니다. 이 두 단어, 탄식과 열림 잘 기억해 두십시오. 다른 삶을 만들어 내는 두 가지 중요한 Key입니다. 주님은 탄식과 열어줌으로 이 사람에게 새로운 삶, 다른 삶을 만들어 주십니다.

(1) 마음의 탄식
34절에 보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향한 탄식이 나옵니다. 하늘을 보시고 탄식하십니다. 답답해 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사람, 이렇게 두면 어떻게 하십니까?’ 탄식은 쉽지 않고 힘듭니다. 그래도 탄식은 있어야 합니다. 이유는 탄식할 때 Acting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지’ 그러면서 그냥 있게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안타까워 해야 할 일은 탄식하면서 안타까워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 부류의 탄식이 나옵니다. ① 귀먹은 이를 데리고 온 사람의 탄식, ② 귀먹은 자 본인의 탄식, ③ 그리고 이를 본 예수님의 탄식이 있습니다. 탄식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탄식들이 합해져서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삶을 만들어 냅니다. 역설적인 탄식의 힘입니다. 탄식을 다른 삶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촉매제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 것처럼, 탄식하는 사람, 탄식이 있는 사람이, 탄식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요즘 어떤 탄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해야 할 탄식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가 깊게 탄식하십시오.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덧붙인다면 어떤 탄식 보다 앞서야 하는 탄식, 꼭 해야 하는 탄식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탄식입니다. ‘자신에 대한 탄식’은 ‘사건에 대한 탄식’보다 앞서야 하는 근본탄식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완고함에 대해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자기 중심성에 대해서 탄식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탄식, 참 보기 힘든 탄식이 됐습니다. 너에 대한 탄식은 많은데 나에 대한 탄식은 없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탄식은 많은데 우리 편에 대한 탄식은 안합니다. 변하기 힘듭니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한 말이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충복입니다. 유태인 학살을 주도한 사람인데 나중에 체포돼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끝끝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한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600만의 생 사람을 죽여 놓고 최선을 다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막힌 논리로 일관하는 아이히만을 보고 한나 아렌트가 일갈합니다. 아이히만은 무능하다. 그러면서 세가지 무능을 말합니다. ‘생각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 판단의 무능’. 이러한 무능성 때문에 악을 행하면서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죽일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이히만의 무능이지만 사실은 뜸끔한 지적입니다. 우리의 무능일 수 있습니다. 생각의 무능성, 말하기의 무능성, 판단의 무능성. 끔찍한 무능입니다. 뼈아픈 후회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무능성이 보일 때마다 탄식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탄식의 영성, 아픔의 영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뼈아픈 탄식이 다른 삶을 열어 줄 것입니다.

(2) 마음의 열림
다른 삶을 만들어내는 두번째 Key는 열림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주님은 귀 먹은 이를 향해 선포하십니다. ‘에바다’ 열리라는 것입니다. 귀가 열리고, 혀가 열려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내라는 것입니다. 35절입니다.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새번역)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삶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장면은 상징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듣지 않는 것으로 치면 우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 마가는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내세우면서, 듣지 않는 이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도 열라는 것이고,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 막고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들어도 건성으로 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듣지 않으면 장사없습니다. 마음 딱 닫아 걸고 귀 막으면 다른 삶은 물 건너 가버립니다.

듣지 않으면 무능한 자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 활짝 열고 들을 때 새로운 것이 밀려 들어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듣지 않으려는 저항이 얼마나 만만치 않습니까? 사람은 깨닫는 만큼만 사는 법인데 들음을 거부하고, 저항합니다. 이런 저항이 소통을 방해하고, 삶을 방해합니다. 관계를 어긋나게 하고, 삶을 어긋나게 만듭니다.

귀도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고, 사람의 소리, 타자의 소리가 들립니다. 소통이 되는 겁니다. 그런 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좋겠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게 아닙니다. 너와 나는 다르고, 생각하는 잣대도 다르고, 같은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소통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소통은 되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할 수 없지만, 마음에 안들지만 벽을 허물어 가면서 소통해 나가는 것이 소통입니다. 그럴 때 새로운, 이전과는 다른 좋은 삶이 만들어 집니다.

잠언의 말씀입니다. ‘귀를 막고..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들으라는 것입니다. 들어야 할 말은 듣기 힘들어도 귀 막지 말고 들어야 자기도 살고, 남도 살 수 있습니다. 마음 열고 듣기 시작할 때 지금과 다른 삶이 만들어진다는 것, 깊게 담으면 좋겠습니다. 뼈아픈 후회를 만회하는 다른 삶은 가능합니다. 탄식과 마음 엶으로 다른 삶 만들어 가는 기쁨과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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