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3: 누가 나를 모욕한다 해도(막7:24~30)
1.
[몽실언니]의 작가인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일본 출생, 1937~2007)의 동시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제목이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인데 한번 들어 보십시오.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이학년인 도모꼬가, 일학년인 나한테,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 생겨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2)
성품 좋기로 소문난 분인데, 동네 아줌마들 앞에서 ‘정생이는 얼굴이 못 생겨서 싫어요’라는 무시를 당한게, 50년이 지났는데도 ‘이가 갈릴’ 정도로 풀리지 않터라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지만 모욕을 받았다고 느낀게 평생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남의 얘기가 아닐 것입니다. 모욕에 장사는 없습니다. 당하는 사람은 평생을 시달리게 되고, 가슴에 응어리로 남게 됩니다. 모욕적인 행동과 말 한 마디에 그동안 쌓아 놓았던 좋은 성품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립니다. ‘당신이 뭔데 나를 무시해’ 다 참아도 모욕만은 참기 힘듭니다. 모욕 받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서 답을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2
말씀 읽으면서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낯선 장면, 익숙하지 않은 장면이 오늘 말씀에 두 장면이 나옵니다. 어린 딸 고쳐 달라고 찾아온 여인을 다그치는 예수님의 모습, 낯선 모습입니다. 지금까지는 아픈 이들 볼 때마다 얼마나 잘 받아 주셨습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막 뭐라 그럽니다.
이것보다 더 낯선 장면이 또 하나 나옵니다. 예수님의 격한 반응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대단한 내공의 여인, 고수, 고급한 여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여자가 어떤 대접 받습니까? 개다, 개 새끼다. 이런 대접 받는데, 이 정도되면 당장에 때려 치우고, 욕하면서 가는 게 맞는데, 보십시오.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낯선 모습이구요, 오늘 우리가 받아내야 하는 중요한 모습입니다.
3.
24절에 보면 이 사건은 두로 지방의 한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되 있습니다. 두로는 갈릴리 북쪽에 있던 이방지역이고, 아주 잘 사는 동네입니다. 이곳으로 주님이 격한 논쟁 후에 잠시 쉬러 가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쉬고 있는 집으로 한 여자가 찾아 옵니다. 귀신들려 아픈 어린 딸이 있는 여자였는데, 그 딸을 고쳐 주고 싶어서 찾아 온 것입니다.
찾아온 여자는 26절에 보면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이고(이방인), 인종으로는 수로보니게 족속(Syrophoenician)입니다. 수로보니게는 시리아+페니키아의 합성어입니다. 시리아 지방에 사는 페니키아 인입니다. 그 유명한 페니키아인의 후손이지요. 30절에 보면 이 집 딸이 누워있는 침상이 나오는데, 이게 보통 집에는 없는 비싼 침대입니다. ‘끌리네’(κλίνη)라는 단어를 쓰는데 요즘식으로하면 에이스 침대 중에서도 최고 좋은 침대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인터넷에서 주문하는 싼 침대격인‘끄라바또스’(κράβαττος)와는 비교할 수 없는 침대입니다. 잘 사는 집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찾아온 이 여인은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는 귀족 가문의 여자고, 잘난 여자입니다. 근데 이런 이가 자기 어린 딸 고쳐 달라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서 간청하고 있는 겁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은데 아이 때문에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렇게 애타는 마음으로 찾아 왔는데 주님은 아주 매몰차게 거절하십니다. 27절 보십시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새번역). 이방인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개는 이방인을 상징하는 욕인데, 지금 이 여자를 개 취급하고, 그 여인의 딸을 개새끼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셨습니까? 유대인들이 기피하는 거라사 지방, 벳새다 지방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신 분이신데 지금은 이방인을 개라고 업신 여기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맞는가 할 정도로 낯선 모습입니다. 아이 때문에 찾아온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모질게 대합니까?
4.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겠지만, 주님은 지금 이 여자를 험하게 건드려 보고 계신 겁니다. 주님께 와서 간청하고 있지만 얼마나 절박한지, 어떤 마음으로 엎드린 것인지 건드려 볼 필요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속 마음을 알기 위해 후려치시는 것입니다. 급한 마음에 가짜로 엎드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남부럽지 않은 여자가 급해서 발 앞에 엎드리기는 했는데, 예배 하기는 하는데, 기도하기는 하는데 정말 예배하는 것인가? 기도하는 것인가?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있는 것은 아닌가? 두들겨보기 전에는 알수가 없습니다. 후려치는데 자존심 상해서 돌아가면 아직은 절실하지 않은 겁니다. 이 정도되면 사실 ‘흥’하면서 돌아가야 됩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하시겠습니까? 교회 왔는데 싫은 소리만 해대고, 자존심 긋는 소리하면 앉아 있으시겠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나 남자나, 아이나 어른이나 사람이 자존심 빼면 남는게 뭐가 있습니까? 최후의 보루가 자존심 아닙니까? 이 정도되면 돌아가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 어떻게 합니까? 삶을 걸었는지 안 돌아갑니다. 견뎌내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거기보세요. 개라는 욕을 듣고 정말 개가 됩니다. 개가 되서 예수님께서 내 뱉는 말씀을 그대로 다 먹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하지만 개들도 식탁 밑에서 자녀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28절. 우리말성경) ‘아닙니다’ 그래야 되는데, ‘그렇습니다, 주님’ 이 한마디가 압권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 맞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먼저 먹어야 하는 것도 맞고, 자신이 개같은 이방사람이라는 말도 맞고. 다 맞다는데 뭐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주님께서 허를 찔린 겁니다.
기분 나쁘다고 간 것도 아니고, 고쳐 달라고 떼를 쓴 것도 아닙니다. 논리로 주님께 맞선 겁니다. ‘개들에게 주는 게 옳지 않다. 그러니까 뭐라 그래요. 개들도 상아래서 부스러기는 먹는다’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부스러기라도 달라. 주님 말도 옳고, 자기 말도 맞다는 겁니다. 예상 못한 당당한 반격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얘기를 듣고 주님은 빙그레 옷었을 것 같습니다. ‘대단하다’ ‘진짜네’. 상 아래서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전혀 추하고, 비굴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욕한 주님보다 더 당당해 보이고, 여유마저 느껴집니다.
5.
낯선 모습이고, 놀라운 모습입니다. 요즘 말로 멘탈이 대단합니다. 이런 멘탈, 이런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모욕과 무시와 깔봄과 조롱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은근한 무시 당함으로 마음 다쳐 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무시하고, 무시 당하고. 사람을 악마로 만들 수 있는 위험하고, 무서운 현상이 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모욕하면 안됩니다. 또 모욕을 받을 때는 이 여자처럼 멘탈이 강해서 모욕에 지지말고 이겨 나가야 합니다. 마음의 용량을 크게 만들어야 합니다.
중국 고전 귀곡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은 치욕을 마다하는 사람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다’ 맞는 말입니다. 큰 모욕이든 사소한 모욕이든 모욕에 넘어지면 실패하게 되는 겁니다. 모욕에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가인 보세요. 하나님게 모욕 받았다는 생각때문에 참지 못하고 아벨을 죽이전아요. 그리고 어떻게 됩니까? 평생을 도망 다니듯 살게 됩니다.
하지만 모욕을 이겨낸 이 수로보니게 여자 보십시오. 귀신 들린 딸 어떻게 됐습니까? 29절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logos)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주님은 이 여자의 말을 Logos로 보고 계십니다. 로고스가 뭡니까? 인간의 말이 아니고 생명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한 말은 보통 말이 아니고 주님께서 기대했던 말이고, 그 말을 한 겁니다.
주님은 인간적인 자존심에 무너지지 않고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 달라는 여자의 진심어린 말을 로고스로 보셨던 겁니다. 이 생명의 말, 로고스로 인해 귀신이 딸에게서 떠나게 됩니다. 귀신은 누가 쫓은 겁니까? 로고스를 가진 아이 엄마, 모욕을 이겨낸 수로보니게 여자가 쫓아 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모욕에 지지 않는 이런 단단함,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입에 발린 소리만 듣지 않고 쓴 소리, 들어야 할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만 우리들 건들지 않고, 주님도 쓴 소리로 우리를 건드리고 계십니다. 말씀으로 후려 치십니다. 상처가 되고, 자존심도 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처럼 ‘옳습니다. 주님’ 그러면서 받아내야 합니다. 마음에 맞는 시원한 말, 위로가 되는 말만 받으면 안됩니다. 뜨거운 말씀, 아픈 말씀도 기꺼야 받아내야 합니다. 절실하고, 절박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존심이 깨질때 임하는 법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어떻게 낫습니까? 자존심 버리고 엘리야 선지자 말 들어서 난 겁니다. 고급한 신앙생활은 자아가 깨질 때 시작되는 겁니다. 수로보니게 여인 같은 고수의 품격이 오늘 아침 저와 여러분들에게 생기기를 바라겠습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