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0. 주일 설교: 우리도 꾸짖어 주소서(막1:21~28). 마가복음 7. 양은익 목사.

 

 

말씀:우리도 꾸짖어 주소서(막1:21~28)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막1:21-28)

어제부터 하늘은 드높고 깨끗하고 청명하며 맑습니다. 선물입니다. 신영복 선생의 글 ’처음처럼’이 생각납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도 맑은 하늘 바라보면서 땅의 복잡한 현실 이겨내는 새로운 힘 얻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첫 번째 사역으로 설교로 대중들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장소는 가버나움입니다. 지도를 보면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입니다. 나사렛과 직선거리로 30~40km 거리입니다. 오고 갈 수 있는 생활반경입니다. 갈릴리의 주요 기관들이 있는 중심 도시입니다. 주님은 지난주 ‘나를 따라오라’ 하시면서 제자 삼으신 네 명의 제자를 데리고 함께 움직이시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본격적인 일에 제자들과 함께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그들이 만나는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시면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모습을 시연(試演)해 주고 있습니다. 스승은 직접 행함으로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안식일입니다. 주님께서 찾으신 가버나움 회당은 처음 찾으시는 회당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은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시기 위해 회당으로 가시곤 했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제자들과 본격적인 사역을 위해 회당으로 가시게 됩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는 기회가 아니지만, 이날 주님은 첫 설교를 하시게 됩니다. 설교의 결과와 파급력은 정말 대단했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일 이후 갈릴리 지역에 예수의 사역이 소문을 통해 널리 급격히 퍼지게 됩니다(28절).

설교를 들은 회중들의 반응은 ‘놀랍다’ 입니다. 마가가 순화된 표현을 써서 놀랍다 한 것이지, 사실 그들은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그 권위에 놀랐습니다(22절). 그들은 주님의 설교를 듣고 소리소리 지르며 저항하는 귀신 축출의 모습을 보면서 놀라며 또 그 권위에 놀라게 됩니다(27절). 이 사건은 주님의 가르침에 반발한 더러운 영이 쫓겨나간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던져질 때 귀신은 소리 지르며 떠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설교를 그 당시 하셨는지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충격받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듣기 쉬운 설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까지 대놓고 누군가 하지 않은 듣기 껄끄러운 선포,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선포였음이 분명합니다. 당시 서기관,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다른 큰 권위와 생명력 있는 말씀 선언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설교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설교는 지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하신 설교처럼 듣기 불편한 설교입니다. 예수님의 설교 들은 우리는 앞으로 계속 살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메시지들은 대부분이 듣기 불편한 설교들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설교입니다. 그런 설교가 필요하다고 느끼셨기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시면서도 계속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설교는 설교자가 모든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 때론 목숨까지 내놓고 하는 설교입니다. 이런 설교는 듣기가 힘든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신 차려야겠구나. 잘못하고 있구나’하는 마음으로 받고, 고쳐 나가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두 번째 부류의 설교는 듣기에 편안한 설교, 설교자에게나 청중(회중) 모두가 안전하게 느끼는 설교입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는 이 두 번째 부류의 설교를 즐겨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로 하셨던 불편한 설교, 가차 없는 설교는 듣기가 정말 불편합니다. 그래도 이런 설교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이런 불편한 설교를 받아들일 여백이 없는 사람을 마가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23절). 한 사람의 인격이 더러운 영(귀신)에 의해 장악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다른 서기관이나 랍비의 설교 때는 일반 회중과 마찬가지로 잠잠히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신 예수님의 권위의 말씀이 선포되자 그 능력에 어찌할 줄 몰라 폭발하는 것입니다. 예배 중 소리소리 지르며 말씀 선포를 거부합니다.

더러운 귀신, 더러운 영이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게 만드는 영적인 세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하심에 전력 질주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소한 모든 것들이 더러운 영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 그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만약 거룩하고 성결한 영이었다면 그 말씀이 설령 듣기 불편해도 달게 감수하고 받았을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쓸 수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히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사람은 폭발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멸하러 왔나이까’ 나사렛 예수라는 표현은 지난주 말씀 드린 것처럼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발언입니다.

성경은 더러운 영(악한 영)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 영은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훼방하는 영입니다. 사탄과 귀신의 세력입니다. 이 악한 영은 사람을 사로잡아 그 사람을 조정합니다. 당연히 나쁜 쪽으로 조정합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여러분들도 요즘 매스컴을 통해 이런 악한 영에 사로잡혀 사회적 지위나 학력이 멀쩡하던 사람들이 성추행 사건으로 인생을 망치는 것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 성추행 당시 모든 사고와 이성이 마비되고 상대방에게 뭔가에 의해 강력하게 끌렸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비일비재하게 만연해 있습니다.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막7:21-22)이 우리의 영을 망가뜨리는 가능성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신앙인들도 많이 무너집니다. 더러운 영이 강력한 자장으로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은 바로 교회(회당) 안입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교회 안에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힘들 것입니다. 듣기 좋은 설교를 할 때는 폭발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예수님의 설교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 폭발합니다. 우리도 잘 살펴봐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도 더러운 영에 끌려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이 말씀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만 좀 하지.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어오면 자신의 상태를 잘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더러운 영이 교회 안에 있는 성도에게도 얼마든지 있다고 합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때 싹이 트이지 못하게 뿌려진 씨앗을 먹어 버리는 나쁜 새의 역할을 악한 영이 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영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이 더러운 영은 타협의 대상도 아니요, 회개시킬 대상도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마귀론’에서 더러운 영은 회개시킬 수 없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타협의 존재도 아니라 했습니다. 주님이 하신 방법을 써야 합니다. 즉 제압시키고 싸워서 쫓아내야 합니다. 주님은 더러운 영을 가진 사람을 다독거리지 않으시고 그 사람에게서 그 귀신을 쫓아내 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회복시키십니다. 이것을 제자들 보는 데서 시연하시고 제자들이 배우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25~26절) 더러운 영은 큰소리를 지르며 나옵니다. 이 모습은 참으로 귀한 장면입니다. 더러운 영으로 피폐해진 인격이 그 더러운 영이 나감으로 인해 회복되고 완전히 새로운 인격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이런 영의 변화를 체험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이렇게 귀한 영, 거룩한 영으로 사로잡히는 큰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줄도 모르고 사는 것처럼 비극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은 꾸짖으셨습니다. (25절) 꾸짖음이란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치는 것입니다. ‘괜찮아’ 하는 것이 아니고 단호하게 꾸짖으십니다. 이 꾸짖음이 이 사람을 살립니다. 꾸짖음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징계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바른 꾸짖음은 때로는 사랑 못지않게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십시오. 교회현장에서 이런 신앙적, 영적인 꾸짖음이 사라지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편안한 설교, 듣기 좋은 설교만을 쫓다 보면 악한 영, 더러운 영에 기회를 줄 수 있음을 경계하십시오.

때로는 질정(叱正, 꾸짖어 바로 잡아줌)이 필요합니다. 준엄한 음성도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편안한 설교에만 만족하고 안주하시렵니까? 말씀으로 내 삶을 돌아보는 각성이 필요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삶,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위선적인 삶. 이런 삶을 하나님은 꾸짖고 책망하십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시고 계십니다. 질정, 사랑이 바탕이 된 주님의 질정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는 편달(鞭撻)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시기에 채찍으로 징계하고 나무라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6) 시편 기자도 꾸짖어 올바른 길로 인도해 달리고 기도했습니다. ‘의인이 사랑의 매로 나를 쳐서, 나를 꾸짖게 해주시고 악인들에게 대접을 받는 일이 없게 해주십오’(시141:5, 새번역)

꾸짖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도 ‘우리도 꾸짖어 주소서’ 입니다. 세상 살다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이 잘 안 들어 올 때, 내 안에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져 갈 때마다 준엄하게 성령으로 또 말씀으로 꾸짖어 주시는 주님의 꾸짖음을 감사함으로 받아내는 영적 능력과 감각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꾸짖음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영에 사로잡힌 자들만이 이 세상을 향해 꾸짖을 자격이 있습니다. 꾸짖는 선지자의 음성을 내놓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너나 잘 하세요’ 합니다. 이렇게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주님의 꾸짖음과 가르침은 놀랍고 영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그 권위의 근원은 주님께서 40일간을 온전한 금식과 기도와 마귀와 사탄의 온갖 시험, 그 매력적인 온갖 유혹들을 다 물리치신 성령의 충만하심에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신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향하여 꾸짖을 때 그 더러운 영이 쫓겨나가고 귀신 들렸던 자가 거룩한 영을 지닌 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꾸짖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 꾸짖으면 돌아오는 것은 냉소뿐입니다. 우리는 깨끗한 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교회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지금 법원에는 교회 사건들이 줄을 서 있다고 합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할 것 없이 교회 내의 사건들이 법원에서 재판관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선지자 일을 해야 할 우리의 꼴이 판사 앞에서 고개 숙이고 재판받는 신세로 전락해 있는 것입니다. 미리 주님의 꾸지람을 제대로 달게 받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스승은 ‘스스로’를 ‘이긴’(勝) 사람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욕망할 정도로 따르는 이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말로 위대한 스승, 정말 자랑스러운 스승을 모시고 있는 행복한 제자들입니다. 우리의 스승은 자신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스승을 욕망할 정도로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 스승 따로, 제자 따로이면 어떻하겠습니까? 따를 수 있는 스승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악착같이 스승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열정을 품고 끈질기게 따르십시오.

우치다 타츠루라는 일본인 철학자가 그의 스승인 레비나스를 따르며 쓴 글인데 한 대목 읽어 드리겠습니다. ‘학자들은 보통, 레비나스 연구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그 의미에서 보면 저는 연구자가 아닙니다. 저는 제자니까요. 스승의 말씀은 단어 하나하나 한 구절 한 구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빛나고 통찰로 차고 넘쳤습니다. 저는 스승의 말씀을 감사히 받아들여 받들어 읽습니다. 의미 같은 건 몰라도 좋습니다. 위대한 현자의 말씀이니까요. 저 같은 정도의 인간이 술술 알아먹을 리가 없습니다’(어른 없는 사회. 279) ‘스승을 두고 자신을 지키려는 자세가 아니라 열려 있는 상태로 자신을 둡니다. 스승의 곁에 있으면 안도감이 전해져 옵니다. 스승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숨결이나 몸의 온기에서 나를 안심시키는 파동이 전해져 옵니다. 스승에 대한 신뢰라는 것은 그런 걸 말합니다’(285)

우치다 타츠루를 보십시오. 인간 스승을 이 정도로 따릅니다. 스승 것이면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비록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스승이 옳기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인간 스승을 그토록 따랐는데 우리는 가장 위대한 스승을 두고도 어떻습니까? 스승을 깊게 느끼시기 바랍니다. 스승의 가르침이 가슴에 큰 파동으로, 감격으로 차고 넘치시기 바랍니다. 스승의 말씀 그대로 온전히 살고자 하는 아름다운 애씀이 우리 안에 차고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혹시 우상을 따르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제대로 스승을 따르면 우리 안에 거룩한 영이 가득해질 것입니다. 스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스승께서 우리를 꾸짖어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늘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스승의 꾸지람과 가르침으로 거룩한 영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들로 인해 예수의 복된 소식이 ‘곧’ ‘널리’ 전파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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