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세상 다시 그리기(막1:16~20)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1:16~20)
유대인들이 늘 묻는 질문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에게도 묻고, 자녀들에게도 묻고,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오늘 이 질문을 여러분들에게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질문, 현자(賢者)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의 답은 현자란 많이 알아서 뽐내는 이가 아니라, 늘 모든 것을 배우는 이가 현자라고 합니다. 둘째 질문, 강자(强者)란 누구입니까? 남을 이기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셋째 질문, 부자(富者)란 누구입니까? 돈 많은 이가 아니라, 자기의 삶에 만족하는 자가 진정한 부자라 합니다. 어느 시대나 모든 이들이 갖고자 하는 인간의 조건이 똑똑하고 강하고 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과 답은 정말 지혜롭습니다.
저는 이 3개의 질문에 한 개의 질문을 추가하겠습니다. 네 번째 질문, 신자(信者)란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해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초점이 흐려지면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사는 이입니다. 주께서 부르실 때 외면하지 않고, 주께서 만드시고자 하는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데 기꺼이 동참하고자 하는 이가 신자입니다. 이 신자의 정의에 따라 살고 못살고에 우리 기독교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신자란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다시 그리는 이들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세상 다시 그리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다시 그리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이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개인 한명 한명 절대로 평범치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을 새롭게 바꾸어 나가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길, 이 부르심에 맞는 자세로 잘 서 나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혼돈과 공허에서 시작한 창조 때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요한계시록까지 계속해서 다시 그리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길 잃어 잘못될 때마다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 계속 고쳐 나가시면서 다시 그리셨습니다. 창조와 대홍수도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 고치시기 위함이었고, 출애굽 사건, 바벨론 포로 사건도 새롭게 시작하시고 고쳐 나가시는 것입니다. 길고 긴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고쳐가시며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시고 계십니다.
주전 8세기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아름다운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 놀라운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6~8)
강한 제국 앗수르에 의해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을 때 이사야는 이런 세상을 그리고 있었던 겁니다. 세상이 아무리 혹독해도, 서러움의 눈물이 마를 날 없어도 이리와 어린양이, 표범과 염소가, 송아지와 사자가 벗이 되고 함께 뛰노는 세상, 현자와 우매한 자, 강자와 약자,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이 더는 의미가 없는 그런 세상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와 같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애쓰는 이들로 인해 역사는 늘 새로워졌고, 결국에는 완전히 새로워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 운동도 사실은 세상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운동(movement, 흐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운동과 흐름은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이 거대한 흐름을 감지하시고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이 꿈을 꿔야 합니다.
지난주 예수님께서는 삶의 아픔이 진한 현장 갈릴리에서 선포하심을 봤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하나님의 통치가 새롭게 시작했다는 선포입니다.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선포 후 첫 번째 하신 일이 그 일을 함께할 이들을 부르는 일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함께 할 이들을 부르는 이 장면이 얼마나 뜨겁고, 설레고, 믿음 가득한 장면입니까! 오늘 부르신 첫 제자는 4명입니다.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입니다.이들을 부르실 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응시와 음성과 응답’입니다. 이 세 가지는 지금도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소중한 모습입니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반드시 기억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1. 응시(凝視,바라봄)
응시는 건성으로 보지 않고 주목하고 집중해서 보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보는 것 같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잠깐 보고 끝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응시는 테스트하는 응시가 아닙니다. 평가하려는 시선이나 배제하고자 하는 시선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삶의 현장을 찾으시고 부르실 제자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만 응시하셨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예수님은 이미 마음에 담은 이들을 지나가시면서 자세히 보고 계십니다.
주님의 응시는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이들을 바라보는 애정의 시선, 따뜻한 응시, 사랑의 응시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응시와 깊은 바라봄이 세상을 새롭게 그려 나가는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의 바라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바라봄은 그들의 전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응시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포장하고 위장하고 가면을 쓴 이들이 너무나 많기에 제대로 응시하지 않으면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다시 그리기 원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나누고자 할 때 사랑의 눈으로 자세히 봐야 합니다.
우리는 내 눈으로 내가 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이 본 것만 보려고 합니다. 세상이 보라고 하는 것들만 보려고 합니다. 남의 눈에 내가 보는 것을 맡깁니다. 우리는 눈의 주권성을 잃어버린 채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사물을 세상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 깊은 응시는 사라지고 눈요기만 남게 됩니다. 눈에 즐거우면 끝입니다. 응시하지 않으면 눈요기 정도로 끝나게 됩니다. 이런 바라봄에는 판단과 지적은 넘쳐나지만 이해와 관용은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눈의 주권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라봐야 그 사람 깊은 곳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눈은 겉으로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버리는 것이지만 믿음의 눈, 영의 눈은 고난 받는 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주변을 봐 나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고, 세상을 바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됩니다.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눈으로는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눈이 천사의 눈이 되어 주위 분들의 아픔을 보고, 함께 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위 분들이 악해지고 화내고 분노하고 아파하면, 그 속에 깊이 자리 잡은 고통과 아픔을 볼 수 있도록 힘쓰고, 그 아픔을 함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셨고 우리가 따라야 할 주님의 응시입니다.
2. 음성
주님은 보신 후에 부름의 소리, 음성을 발하십니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십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랍비가 가르칠 제자를 찾아와 따르라고 하는 예는 없습니다. 제자가 스승 랍비를 찾아 배움을 청하는 것이 유대 사회의 관행입니다. 아마 이런 주님의 모습을 사람들은 비웃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배울 학생들을 모으러 직접 다니나? 했을 것입니다. 체면에 살고 체면에 죽는 것이 유대 사회입니다. 주님의 이 행동은 파격적인 것입니다. 주님은 주위의 시선이나 관행에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의 틀을 깨고 있습니다. 사람을 불러내야 할 우리가 잘 봐야 할 모습입니다.
주님은 어떠한 미사여구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만을 담고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부르심의 분명한 목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음성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지 상관 안 하시고 주님은 음성을 던지십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려면 음성이 던져져야 합니다. ‘예수님 좀 믿어보시겠어요?’ 이런 음성이 있어야 하고 던져져야 합니다. 음성을 던지십시오. 주님처럼 하십시오.
지금은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시대입니다. 너의 소리, 바깥의 소리, 타자의 소리는 듣지 않는 시대입니다. 안 듣는 사회 속에서 반드시 들려줘야 하는 이 소리를 침묵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안 들으려 해도 들려줘야 합니다. 여러분이 포기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럼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듣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환영받는 사람, 반가워하는 자가 되면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사람을 낚는 어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을 위한 어부, 사람을 섬기는 어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음성을 그들이 귀담아듣게 하려면 그들을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섬기고 사랑할 때 그들은 우리의 얘기에 귀를 열어 줄 것입니다. 음성도 전하고 사랑도 전하십시오.
3. 응답
응시와 부르심의 결론은 응답입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부르실 때 다 버리고 따라야 하니, 세상의 눈으로 보면 주님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따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자는 다 버리고 따릅니다. 자신의 것을 다 나누어 주며 따릅니다. 주님의 따르라는 명령은 엄청난 권위가 있으셨습니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는 명령에 네 명의 제자 모두 그대로 했습니다. 가지고 있던 그물과 배를 버리고 따랐고, 아버지와 품꾼들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 당시 고기잡이를 하는 어권이 있어야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데 이 어권은 상당히 비쌌다고 합니다. ‘이 어권을 팔고 따르겠습니다’ 할 법도 한데 그렇게 말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권위가 대단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첫 번째 사역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이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은 헌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자 주님을 따르면서 내 할 일 다 하면서 한쪽 발만 걸친 채 주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들으시면서 많이 불편하고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내야 합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르심을 따르는 우리의 따름의 응답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따르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 헌신의 따름이 있을 때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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