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5.21. 주일 설교: 세상의 빛(마5:14~16). 양은익 목사


말씀: 세상의 빛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노란 개나리와 붉은 진달래가 피는 것을 즐거워하며 봄을 맞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여름이 훌쩍 와 버렸습니다. 올여름은 상당히 덥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넉넉한 마음으로 더운 여름 잘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계절도 살아 움직이지만 우리의 삶도 살아 움직입니다. 그 살아 움직임은 몸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몸이 움직여야 살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몸이 움직여야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몸으로 움직이기 전까지는 마음은 가능성일 뿐이지, 현실은 아닙니다. 내 몸짓을 통해서 결국 내 마음 짓이 현실이 되는 겁니다. 오늘 저이한테 따듯한 말을 한마디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실제로 행함(몸짓)이 있어야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나의 몸짓을 통해 구체화할 때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믿는 것만으로 모자랍니다. 믿음이 내 몸짓으로 구체화하고, 보일 때 믿음이 현실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길은 ‘몸으로’ ‘살아있어야’ 합니다. 말만 있어도 안 되고, 마음만 있어도 안 됩니다. 마음의 믿음이 몸의 행함으로 실현될 때 믿음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경주마는 달리기 위해 생각을 멈추지만, 야생마는 생각하기 위해 달리기를 멈춘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주마는 생각하는 순간 뒤처집니다. 야생마는 달리기만 하면 안 됩니다. 생각 없이 달리다가는 맹수들 한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야생마는 생각해야 합니다. 말로 비유해서 죄송하지만, 여러분은 경주마와 야생마 중에서 지금 어느 쪽입니까? 생각을 안 하고 달리기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생각하기 위해 달리기를 멈추고 있습니까? 달릴 때도 있고, 멈출 때도 있지만 신앙적인 면에서는 우리 모두 달리기를 잠시 멈추고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내 믿음의 몸짓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멈춰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보았던 위대한 50일의 시간은 야생마의 시간이었습니다. 힘차게 달리기를 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시간입니다. 위대한 50일간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낙심하고, 좌절하고, 의심하며,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죽음을 극복한 부활의 소식을 ‘몸’으로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설득한 게 아닙니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죽음을 극복한 생명의 몸을 보여 주셨고, 그 몸을 보면서 살아 계신 주님을 경험케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살아 있는 몸(몸짓)이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짓이 또한 중요하지만 부족한 나의 몸짓 하나하나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몸짓에 다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하심으로 그들은 다 살아났습니다. 밖으로 나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그들은 용감하게 물밀 듯이 세상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순교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몸을 가지고 사는 신앙인의 삶은 믿음을 그의 몸짓을 통해 보여주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활은 주님의 몸을 통해 갖는 신앙인의 자존심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인터뷰에서 부활의 정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입니다’라고 답하셨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합니다.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렇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깨끗이 끝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들의 자존심입니다. 부활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동일하게 부활케 하실 것이며 우리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실 것입니다. 부활의 강한 믿음이 여러분의 삶에 새롭게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부활을 믿는 자는 삶에서 몸짓을 통해 부활을 나타내야 합니다. 부활의 마음과 믿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 몸짓으로 부활의 몸짓을 살 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부활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주님은 과거에 부활하셨고, 현재는 부활할 사람들처럼 살며, 미래에 우리는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은 현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현재는 다른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8:12) 선언하셨던 주님께서 이제는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라고 분명하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빛이고, 부활의 삶을 사는 우리도 빛입니다. 빛이 되라가 아니고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빛입니다. 빛이기에 빛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빛으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세상의 빛다운 삶입니까? 이 개념을 많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입신양명하는 것을 세상의 빛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삶, 부러워하는 삶, 성공해서 칭송받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성공이라고 하는 세상의 처세술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의 빛은 촛불입니다. 촛불은 자신을 태워야 빛이 나는 광원입니다. 소금이 녹아야 맛을 내는 것처럼 빛은 자신을 태워야 빛이 납니다. 즉 빛의 전제는 ‘희생’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빛은 이름을 내는 빛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것만 알아도 많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잘못된 세상의 빛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거대한 구름에 가려진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공에의 열망, 실패의 두려움. 내세울 것 없는 것에 대한 초라함. 온통 이것으로 어둡게 드려져 있습니다. 내세울게 없으면 교회도 오래 못 다닙니다. 자꾸 옮겨요. 그리고 나중에는 때려치웁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빛은 이런 빛이 아닌데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빛이란 무엇일까요? 삶에서 성공해서 드러내는 빛은 확실히 아닙니다. 세상의 빛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겪어내는 삶 전체가 빛입니다. 그렇다면 성공만이 빛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공이든 실패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빛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삶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실패와 좌절도 빛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나의 실패와 좌절에 반응하는 나의 모습이 나의 주변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면 나는 세상에 빛으로써의 소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실패조차도 빛으로 만드는 삶, 아름다운 삶, 신자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의에 편승해서 성공하는 삶은 세상의 빛이 아닙니다. 불의와 악을 거부하다 실패하는 게 더 우아하고, 값진 패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실패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힘을 줍니다. 성공이 빛이라는 일방적인 공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시면서 세상의 빛은 ‘산 위에 세워진 동네’(14절) 같다고 했습니다. 산 위에서 환하게 빛을 비추면 그 빛은 더 널리 빛을 퍼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빛이 되면 ‘아! 저렇게도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면서 사람들이 우리를 우러러봅니다.

우연히 해외 난민 봉사를 꾸준히 하고 있는 배우 송강호씨의 글을 보게 됐습니다. ‘한번 혹은 몇번의 패배로 물러나는 미완성의 패배가 아니라 어떤 시련과 절망과 좌절도 끝내 거부하고 끝없이 패배하는 삶을 한없이 긍정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삶이 우리의 운명이 되야 한다’ 참 멋집니다. 산위에 동네를 세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눈물과 땀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어둠과 이렇게 싸워야 합니다. 믿음을 굳건히 하고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5). 15절에서 빛의 방향은 집안을 향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 빛의 방향은 집 밖입니다. 빛의 방향은 밖을 향해서만 있으면 안 되고 집안을 향해서도 비추어야 함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정에서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빛은 사랑의 빛, 관용의 빛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집안에서 환한 빛을 잘 비추고 계십니까?

동학의 두 번째 교주였던 최해월의 글입니다. 배울 점이 있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며 살림을 하는 여성은 신령한 존재이다. 그러나 여성의 마음은 편벽된 데가 있어서 화를 잘 낸다. 부인이 남편에게 화를 내면 남편은 부인에게 큰절을 해야 한다. 한번 절해서 마음이 풀리지 않으면 10번 큰절을 해야 한다. 그러면 도척같은 마음도 풀린다’ 이것도 얼마나 대단한 마음입니까? 대부분 우리는 상대의 한 번의 화에도 오히려 더 많이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집안에 비취는 빛에 대해 많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깊고 풍성해야 합니다. 세상의 빛은 흰색과 검은색만 있는 게 아닙니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 1,500가지 정도의 색이 있는데 희냐, 검으냐, 성공이냐, 실패냐, 이익이냐 손해냐만 높고 싸우면 되겠습니까? 부활의 빛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여러분들, 부디 세상의 빛이 되셔서 사람들에게 부활의 빛, 생명의 빛 마음껏 비춰 주십시오. 사람들은 여러분들의 환한 빛, 착하고 아름다운 삶을 보고 부활의 자녀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16절의 말씀 크게 한목소리로 읽고 마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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