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9. 주일설교. 새 길을 여는 사람(요1:19-28). 양은익 목사

 

말씀: 새길을 여는 사람(요1:19~28)

명절의 기쁘고 풍성한 좋은 마음으로 힘차게 한 해 보내시기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고 루쉰은 얘기했습니다. 길은 원래 있던것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며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즉 처음에 그 길을 걸었던 사람의 고생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희망도 내가 만들어갈 때 어둠 가운데서 희망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이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길’은 하나의 은유입니다. 우리 인생의 길은 이것과 같습니다. 매일이 새길입니다. 매일 매일 희망이 필요하고 매일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대신해 줄 수 있겠습니까?

요즘은 계산하며 사는 시대입니다. 계산을 안 할 수는 없지만, 계산만 하며, 이해타산만 밝히며 손익만 따지면서 살면 안 됩니다. 조그마한 손해나 희생은 전혀 안 보려 하는 태도로, 세상 사람들과 같은 악착스러움만 갖고 살게 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세례요한처럼 새길을 만드는 삶은 고생과 희생이 담보되어야 가능합니다.

새_길을_여는_사람
선택과 결정을 할 때 고려되어야 할 것은 경제적인 면(이익과 손해)도 있지만, 윤리적인 면(옳음과 그름)도 있습니다. 이것과 더불어 신앙인들은 지금의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살피는 신앙적인 면도 고려해야 합니다. 즉 선택과 결정은 4차원이 될 수도 있고 8차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도표에서 1번의 선택은 나의 선택과 결정이 이익이 있고 윤리적으로 옳고 하나님 뜻에 맞는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선택입니다. 4번의 선택은 최악의 선택입니다. 손해도 보고 윤리적이지 않고 하나님 뜻에도 맞지 않는 선택입니다.

2번의 선택은 경제적으로는 이익이지만 윤리적으로 그른 경우입니다. 우리는 이 선택을 하고 합리화할 때가 많습니다. 상황을 합리화시키며 구조적인 악에 들어가면 신앙인들에게는 아픔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3번의 선택은 윤리적으로 옳지만, 손해를 보는 선택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득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이 선택은 쉽지 않습니다. 이 선택은 삶의 지향점이 분명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오늘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새 길을 여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3번의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세례요한은 철저히 3번의 선택을 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 살았습니다. 광야는 정말로 살기 힘든 곳입니다.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의 세례요한입니다. 그런 그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힘든 삶을 삽니다. 그 생활은 돈도 떡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게 공격당하는 삶입니다. 세례요한은 철저히 3번의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실로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광야를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 이하를 보면 그들은 요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합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정체가 뭐냐고 대놓고 묻습니다. 그 대답으로 요한은 인생이 바뀔 수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러나 부정합니다. (3번) 자신은 메시아도 아니다. 엘리야도 아니다. 그 선지자(모세)도 아니다. 유대인들은 사실 세례요한이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요한이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기회를 날려 보냅니다.

요한이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것입니까? ‘꽉 막히고 고지식한 사람은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고 성공하기 힘들다’라는 생각이 우리의 사고 체계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해야 세상 살기가 편안합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띄워주는 대도 ‘아니다’로 일관합니다. 그래서 그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요한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와 매우 다릅니다. 요한이 왜 이렇게 살았는지? 왜 그 길을 그렇게 고집스럽게 갔는지? 우리는 그 단서를 그의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 이 생각이 요한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요1:27).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1:23) 요한은 이렇게 자기 삶의 역할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3번의 선택을 했습니다. 손해 볼 것을 알지만, 끝까지 손해를 감수한 것입니다. 이 선택이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는 이 3번의 선택을 하며 살고자 하는 우리 이웃 성도들에게 오히려 왜 고집스럽게 사냐고? 왜 융통성이 그리도 없냐고? 오히려 그릇된 권면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한은 주위의 모든 염려의 소리를 물리치고 꿋꿋이 3번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삶조차도 주인이 되어 살지 못하고 사회의 분위기와 풍조에 휩쓸려 사는 우리에게 요한은 큰 도전을 줍니다. 요한은 세상 풍조속에서 세상의 권세에 기죽어 나도 모르게 그들을 따르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가 갈 길은 그 길이 아님을 깨닫게 해줍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사람은 복사판이 아니라 원판이다’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과 소명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2:20, 새번역)

우리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에 진정으로 원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 어떻게 함부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길이 혹시 막혔습니까? 절망하지 마시고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뚫고 새길을 만들어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입구와 출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M.하이덱거)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입구(하나님)와 출구(하나님)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것만 제대로 알면 충분히 떳떳할 수 있고, 세상을 향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한은 광야에 살며, 자신이 망하고 주님이 흥해야 한다는 분명한 자신의 존재의식이 있었기에 희생을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올 한해 길이 막힐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뚫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넘기지 마시고 여러분 스스로가 세례요한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가 여러분으로 인해 살아나고 회복되는 은혜가 넘치시기 바랍니다. 새길을 만들어 가는 여러분의 고생과 희생과 헌신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함께하는 한 해 되시기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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