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 주일 설교. 복원의 마음(마26:65-75). 양은익 목사

 

말씀: 복원의 마음(마26:65-75)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가득한 주일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며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신 주님 말씀을 듣고 따랐던 베드로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기적을 늘 함께하며 체험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는 아마 두렵고 무서웠던것 같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매우 아쉽습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우리에게 큰 아쉬움과 후유증을 남깁니다.

영국의 여류 소설가인 제인 오스틴은(1755~1817년) ‘우리는 서로서로 저버리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상처받은 존재들이니까’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버겁습니다. 그래서 상처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서로서로 저버리지 않도록 하자 이 말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예측 불가능한 일이 가득한 이 세상, 상처 속에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 우리는 서로를 저버리지 말고 살피고,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경고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보다 더 저버리고 살아갈 일이 많은 삶의 상황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겸손히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한 상황을 그냥 ‘죄송합니다’ 하고 끝내버릴 상황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 배신으로 잃어 버린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잃은 것들을 찾아야 합니다. 복원하고자 하는 복원의 마음으로 한 해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잃어 버린 것들은 우리가 복원할 것들입니다. 염치와 자부심과 희생과 신비함입니다. 우리도 삶의 버거움 속에서 아차 하면 베드로처럼 이 귀중한 가치들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1.염치.
염치라는 단어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중하고 중요한 가치이기에 꼭 알고 유념해야 할 단어입니다. 염치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부끄러운 일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면 뻔뻔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합니다.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이렇게 속절없이 무력하게 만들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아마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정상적인 감정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막는 감정, 그래서 내가 후회할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감정, 내가 지켜야 할 선을 무너뜨리는 감정(힘), 그래서 나로 하여금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 옳음과 그릇됨의 구분을 무너뜨려, 나를 무너뜨리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두려움, 돈, 너무나 버거운 삶의 현실 같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염치를 모르고 사는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며 합리화합니다. 사실 이 삶의 상황이라는 것들이 너무나 힘겹기에 염치를 지키며 사는 것이 정말 어렵고 힘듭니다. 그래서 실제로 막무가내로 뻔뻔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박완서 선생은 생전에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을 만들고 싶다고까지 했습니다. 요즘은 지성인들조차도, 신앙인들조차도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우리는 자신을 살펴보아,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성도로써 ‘이건 아니다.’ 싶으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염치없는 행동이 습관화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염치 있게 살아야 합니다.

2. 자부심
베드로는 자부심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주님의 수제자였습니다. 학생으로 치자면 3년 내내 반장이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영적인 안목이 탁월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를 고백한 것도 베드로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를 무너뜨린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그것은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특검 같은 세력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여종(69절, 71절)과 곁에 있던 사람(73절) 입니다. 이것의 상징적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70절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난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 72절에서 좀 더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맹세하고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 74절에서 점층법으로 더 강하게 부정합니다. 저주하여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 그리고 이런 본인의 행동을 통곡하며 후회합니다.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

베드로는 지켜야 할 자부심을 지키지 못했기에 통곡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의 자부심을 지키면 우리는 실패를 막을 수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도 자존심을 잃고 살았던 시간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마음을 시로 적었습니다. ‘나에겐 버릴 수 있는 자존심이 너무 많은 게 탈이었다. 돈과 혁명 앞에서는 가장 큰 자존심을 버려야 했다. 버릴 수 없으면 죽이기라도 해야 내가 사는 줄 알았다. 버릴 수 있는 자존심이 너무 많아서 슬펐던 나의 일생은 이미 눈물로 다 지나가고. (정호승, 자존심에 대한 후회, 부분)

삶의 상황에서 쓸모있는 신앙인의 자존심은 절대로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황혼기에 이런 후회로 생기는 쓸쓸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폴리갑 주교는 잡혀서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 끌려갑나다. 로마군들은 ‘네가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유혹합니다. 폴리갑 주교는 얘기합니다. ‘나는 여든여섯 해 동안 그분의 종이었고 그분이 나를 홀대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하신 내 왕을 모독할 수 있겠소. 당신이 위협하는 그 불은 잠시 타다가 곧 꺼지오. 당신이 모르는 불이 있는데, 다가올 심판과 영벌의 벌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오. 무엇을 망설이시오? 원하는 대로 하시오?’ 세상은 우리의 신자 됨을 끊임없이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3.희생(sacrifice)
베드로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희생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교회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2-14)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중요한 말씀입니다. 분명 베드로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설교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박사 논문에서 성 어거스틴의 사랑의 개념에 관해 썼습니다. 너무나 적나라하게 지적하여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사람이 오직 기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적 그리고 심지어 죄인조차도 사랑을 발휘할 기회에 불과하다.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실제로 시랑 받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그 자체이다’ (한나 아렌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2013)

사랑은 기회뿐이고 늘 기회만으로 남아 있을 것을 지적합니다. 에로스 사랑 속에 갇히게 되면 실제로는 전혀 남을 돌보며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 희생, 용서, 섬김 등 이 모든 중요한 가치들이 이런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물에 빠지면 입만 물에 뜰 거라고 지목받는 인물이 국회의원과 목회자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실제로는 공범입니다. 희생이란 가치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희생에 기대어 삽니다. 어느 누군가의 희생이 없으면 사람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희생이 없으면 희망이란 가치도 없게 됩니다. 희생이 없이는 사랑도 희망도 교회 섬김도 모두 힘들어지게 됩니다.

4. 신비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신비하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눈앞에서 예수님의 표적과 기적을 보았던 제자입니다. 베드로도 그 두려움의 순간에 하나님의 신비하신 역사 하심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눈앞에 일어나는 일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깜깜한 밤 횃불을 든 무리,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죽이려는 그들의 기세등등함에 대한 두려움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 하심, 역사하심, 일하심에 대한 기대가 그에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오로지 현실만 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현실만 보면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신비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구하는 신비의 삶을 꼭 사시기를 바랍니다. 부부의 만남도 신비로 수용할 때 서로 간에 깊은 사랑이 우러나오게 됩니다. 깊은 사랑은 인내하게 합니다. 어떤 어려움도 견디게 합니다. 교회에서 교우들과의 만남, 내 주위 사람들과의 만남도 이 신비의 관계를 수용할 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해지고, 모든 것이 귀해지고 가치 있어 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아쉬운 것은 이 신비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버거운 삶의 현실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지켜야 할 염치를 지키시고, 신앙인으로서의 자부심도 지키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구하는 신비함을 가지셔서 승리하는 삶 사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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