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비방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탈무드에 “남을 비방한다는 것은 살인보다 위험한 일이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비방은 세 사람을 죽인다. 비방하는 사람 자신, 그리고 듣는 사람, 비방 당하는 사람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듯이 무심코 던진 비판과 비방으로 한 사람이 죽을 수도,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새번역에는 심판하지 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새번역이 더 적절히 본문 뜻을 전해줍니다. 비판(criticism)과 심판(judgement)은 구분해야 합니다. 비판은 잘잘못을 가려서 잘못된 것을 드러내어 지적하는 것입니다. 심판은 더 깊이 들어가서 잘잘못을 드러내고 잘못을 정죄하고 저주까지 하는 것입니다. 심판이 강도가 더 센 것 입니다. 심판은 냉정하고 냉혹하고 엄정합니다. 자비와 사랑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비판은 그 안에 자비와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쓴소리일 수 있습니다.
정당한 비판은 사랑과 자비가 있을 수 있어서 삶의 잘못을 고치고 바르게 하기 위해 꼭 있어야 하고, 비판을 제대로 받아들일 때 사람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판을 대부분 싫어하고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숙할수록 비판을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한동안 죄중에 있을 때 쓴소리하는 나단 선지자가 있었기에 다윗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왕에게 비판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고 왕의 위치에서 비판을 수용하고 회개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것을 해냄으로 다윗왕은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고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나단도 훌륭하고 쓴소리 받아들인 다윗도 훌륭합니다. 시편 51편에 다윗의 회개가 나옵니다.
정당한 비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비판은 교정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신앙인에게 삶의 교정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화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교정을 받아야하고 교정받으려는 마음의 열림이 있어야 합니다. 살다보면 남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때 쓰는 언어가 비판인지 비방인지 심판인지 살펴보고 해야합니다. 비방이나 심판이면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심판은 저주이고 정죄이므로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심판의 말을 하면 안됩니다. 심판은 하나님만 하십니다.
나의 근본적 자세가 중요합니다. 본문은 비판은 하되 심판은 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호되게 비판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7:1) 본문 말씀은 비판은 하되 심판은 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바리새인의 잘못된 의를 비판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 금식, 기도하지 말라고 비판하셨습니다. 비판으로 우리를 교정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잘못된 것이 많은데 그냥두면 신앙도 죽고 하나님 백성도 죽습니다. 바른 비판이 있어야 살아납니다. 현대 교회 내에는 권징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근신이 필요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정당한 비판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함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정당한 비판이 없으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판하지말라는 말씀은 “비판하되 심판은 하지말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정당한 비판을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입니까? 비판을 잘못하면 오히려 더 아픔이 옵니다. 신앙문제, 가정문제, 삶의 많은 문제에서 비판을 잘못하면 더 큰 어려움이 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삶에서 잘 받아들여야 하는 말씀입니다. 비판을 잘못했을 때 부메랑이 되어 돌아 온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너무 쉽게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왜 이 말씀을 주셨습니까?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며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잘못된 비판은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자신이 더 큰 잘못을 하고 있는데도 남의 잘못만 보고 비판하는 것이 잘못된 비판입니다.
삶은 늘 판단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 판단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내가 더 잘못하고 있는 것이 많을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의 잘못만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지적하는 우를 범합니다. 왜그렇습니까? 왜냐하면 모든 판단에는 자기중심적인 편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깁니다(자기중심적 비판,자기 편향적 비판). 우리의 판단, 비판은 이렇기에 날선 비판과 판단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 어린 조언도 안들릴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이 나의 감정과 성향에 따라, 기분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아픔입니다.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신앙인은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 이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판할 때 더 조심해야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3~4절에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신데 어째서 너희가 나를 판단하느냐 합니다.
자기를 먼저 살펴보고 본인 눈의 들보를 먼저 보는것이 Key입니다. 명심보감에 “대면공화 심격 천산 對面共話 心隔千山“이라 했습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해도 서로의 마음 사이에는 천개의 산이 가로막힌듯 하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아는게 얼마나 어려우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심격천산인데 어떻게 한번 만나보고 상대방을 판단하고 비판할수 있습니까? 한번보고 판단하는 것은 그래서 말이 안됩니다. 한번보면 다안다는 자세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만일 그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그는 게으르다하고, 내가 일을 끝내지 않으면 나는 너무 바쁘고 많은 일에 눌려 있기 때문이라 하고, 만일 그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면 수다쟁이라 하고, 내가 다른 이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건설적인 비판을 한다고 하고, 만일 그가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해서라 하고, 만일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다고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순간에 복잡한 다른 많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고, 만일 그가 친절하게 하면 나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게 친절하다. 하고, 내가 친절하면 그것은 내 유쾌하고 좋은 성격의 한 부분이라 하고, 그와 내가 이렇게 다르다니 얼마나 딱한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편향적입니다.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전혀 못합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비판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똥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 “는 꼴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정확한 지적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잘 생각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더 통렬하게 드려다보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면 하루에도 수십번 선무당이 사람잡듯 다른 사람에게 수도 없이 상처주고 베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 꼭 적용하는 말씀 되시 바랍니다.
상대방의 속을 깊이 헤아리고 그 행동 이면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헤아려줘야 비판함으로 그 사람을 살려 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내 눈속의 들보를 못보고 비판만 하면 주님이 비판하신 바리새인과 내가 뭐가 다르겠습니까? 나를 돌아보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피철철 흐르는 비판은 상대를 죽이고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7:5)”
주님의 대안이십니다. 명심 또 명심 하십시오. 이 말씀은 형제의 잘못을 모른척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잘못을 알려주기 전에 나 자신부터 먼저 살피고 내 눈의 들보를 빼낸 후 비판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비판은 나단 선지자와 같이 타인을 살리는 비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타인을 볼때 자꾸 부정적으로 보이면 나를 돌아봐줘야 합니다. 내 마음에 문제가 있는지? 자신의 모습을 의심해 보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내 마음이 부정적이고 자꾸 화가 나고 속상하면 빨리 나를 돌보고 나를 살펴줘야 합니다. 비판, 판단은 어렵지 않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비판만 하면 안됩니다. 착하고 어진마음으로 다가가서 새로운 텃밭을 만들어야 합니다.
초기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이 한 말이 있습니다. ‘그를 바로 잡아라. 하지만 원수로서 혹은 벌을 강요하는 적으로서가 아니라 의술을 제공하는 의사로서 그렇게 하라’
중세 신학자였던 에크하르트의 말입니다. ‘거짓과 악은 저주와 비판으로는 극복 될 수 없고 진리와 선의 압도적인 노출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다 따뜻하고, 사랑이 있는 비판을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무리가 몰려들어 주님이 어떤 답변을 내더라도 곤경에 빠뜨리고자 시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는 말씀 앞에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과 단 둘이 남은 것을 확인하시고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돌아가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아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비난 비판하면서도 사랑하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야 상대를 고치고 살려낼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며 마치고자 합니다. 불의한 세상 살다보면 비판이 필요합니다. 비판하는 나도 들보를 가졌기에 심판자가 되면 안됩니다. 정당한 비판이라해도 상대를 죽이는 날선 비판은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상대방을 살리는 치유의 비판을 해야합니다. 비판 할일이 있어서 비판한 후 마음이 아프지않고 혹시 속이 시원했다면 살리는 비판이 아닌 죽이는 비판을 한겁니다. 잘못된 비판을 한겁니나 제대로 해야 합니다. 길 안내자의 아름다운 역할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다.(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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