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설교 15: 마음 눈 밝은 사람(마6:22~23). 양은익 목사. 2016.5.29.

 


2016년 5월 29일 주일 예배

산상설교 15: 마음 눈 밝은 사람(마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신앙의 삶을 살 때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글 하나 보겠습니다. 어린이 도서전(2013년. 볼로냐 라가치)에서 대상 받은 ‘눈’(이보나 흐리엘레프스카)이라는 그림 동화입니다. “눈은 우리에게 얼마나 값진 선물일까? 눈은 매일 우리를 이끌어, 눈은 위험을 발견하고 우리를 구해 주기도 해. 우리는 눈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볼수 없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지. 어떤 이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해”

어린이를 위한 동화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입니다. 눈은 우리를 이끌어 주는 선물입니다. 눈이 있는데 봐야 할 것을 못 본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삶에서 잘못 보고 잘못 들으면 삶이 잘못된 길로 갑니다. 시간이 지난 후 곰곰히 돌이키면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맹모삼천지교”는 공동 묘지 근처에 살자 아이가 곡하는 것만 보고 배워 곡하는 흉내를 내자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합니다. 장사하는 것 보고 슬슬 훔치고 속이는 것을 배웁니다. 어머니는 글방 근처로 이사합니다. 글 읽고 공부 하는 것을 보자 아이는 공부를 시작합니다.

보고, 듣는 것은 아동이나 성인이나 동일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듣는지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보고 듣는 것으로 지금의 내 삶이 만들어 집니다. 보라는 것을 안보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보고 듣고 시간을 보내면 내 삶의 방향이 안 좋은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습니다.

“눈은 감옥”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본 것으로 나를 가두어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 감옥이고 폭력적이라 합니다. 무엇을 보는지가 중요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한자에는 ‘보다’는 말이 두개가 있습니다. 見과 觀입니다. 견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입니다. 관은 뚜렷이 보는 겁니다. 생각하면서 보는 겁니다. 주목하고 뜻을 생각하며 보는 것입니다. 견과 관은 차원이 다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觀입니다. 무엇을 봐도 허투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나를 만들어 간다면 우리가 자세히 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이 자세히 봐야 할 첫째일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생활 잘하고 있는지도 잘 살펴야 합니다. 삶의 지혜는 자세히 볼 때 4가지를 통해 옵니다. 자연과 사람과 경험과 하나님을 제대로 잘 봐야 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 말씀에서 주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거나 금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께 잘 보이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메세지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너희 눈은 너의 몸의 창문이다. 네가 경이와 믿음으로 눈을 크게 뜨면 네 몸은 빛으로 가득해진다. 네가 탐욕과 불신으로 곁눈질하고 살면 네 몸은 음습한 지하실이 된다. 네 창에 블라인드를 치면 네 삶은 얼마나 어두워지겠느냐?”

여기서 몸은 우리의 삶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눈은 빛을 받아 들이는 창문입니다. 음습해지고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눈은 마음의 눈, 믿음의 눈, 영의 눈(영안)입니다. 마음의 눈은 추상적이지만 실제하는 눈입니다. 마음의 눈(심안)은 다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 같지만 마음으로 정신으로 영혼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있다면 믿음의 눈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눈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간구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영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사는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눈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암흑속에 살게 됩니다. 주님도 산상 설교를 듣는 제자들이 이런 기도를 하여 영의 눈이 열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눈이 열리지 않으면 영의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이 눈이 열려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6장에 엘리사의 종 사건이 나옵니다.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4-17)

이 엘리사의 기도는 유명합니다. 그 기도로 엘리사의 종의 영의 눈이 열리니까 못보던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메세지가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영의 눈이 열리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출구를 보게 됩니다. 새로운 미래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눈이 열려 막힐 때마다 불말과 불병거를 보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 매일 일상에서 보는 것만 보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문이 닫히면 다른 것은 안봅니다. 이것을 선입견, 편견이라 합니다. 보는 것만 보려고 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손해보는 것입니다. 발전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신앙인은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은 覺醒(Awakening)을 통해 일어납니다. 정신, 마음, 신앙이 모두 새로워지는 겁니다. 각성은 삶에 기쁨을 줍니다. 각성의 경험은 계속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살아있고 내일도 살아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인 각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각성이 일어나면 보지 못할 때 부끄러운 일을 안하게 됩니다. 믿음의 눈이 없을 때 보던 것을 쳐다 보지 않게 됩니다. 각성되서 그런 겁니다. 각성이 일어 날때 우리의 삶은 아름다워집니다. 각성을 통해 자기 성찰을 하고, 분별해 내는 능력을 갖는 것이 신앙 여정에 필요합니다. 성찰과 분별을 못하면 우리의 삶은 계속 아픔속에 있게 됩니다.

省察은 자신을 다시 살펴 보는 것입니다. 제대로 살고, 믿고 있는가? 살피는 것입니다. 성찰이 없게 될 때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에 속게 됩니다. 또한 이 세상의 겉모습에 쉽게 속게 됩니다. 속지 않으려면 밖으로 향한 눈을 안으로 향해 봐야 합니다. 성찰하면 많은 것을 고칠 수 있습니다. 내가 많이 커질수 있습니다. 신앙은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눈을 떠가는 과정입니다. 分別이란 나를 돌아보는 신앙의 모습을 가질 때 선물로 오는 것입니다. 성찰하면 분별력이 생깁니다. 실패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알아 가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분별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고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이 과정이 빠지면 믿음의 눈은 닫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말씀보면서 지금 나의 결정이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지 분별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눈이 닫혀 있으면 분별 못한다고 하십니다. 분별 못하면 중요한 보화를 하늘에 쌓지않고 땅에 쌓아 도둑맞고 녹슬게 된다하십니다. 중요한 것을 다 못쓰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믿음의 눈을 떠서 분별력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본문 24절에서 분별 못하면 재물과 하나님 중 택할 때 재물을 택하고 하나님 뜻에 맞는 생활을 못하게 된다 하십니다. 이것은 헌금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을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재물과 하나님 중 무엇이 중요한지 믿음의 눈을 떠서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떠져야 볼 수 있는 놀라운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울 때가 너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돈을 대하는 태도가 더 기독교적일 때가 많습니다. 돈의 폐해를 우리 보다 더 깊이 꿰뚫고 있습니다. 돈과 자본주의 때문에 인류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각성으로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목사님들은 어떠합니까? 때로는 목사님들이 돈을 더 밝힙니다. 부끄럽기 한량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욕심, 탐욕으로 가득하면 음습한 곳에 있게 된다 했습니다. 누구 눈이 밝은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이 떠져서 제대로 분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낙관과 희망은 다릅니다. 믿음의 눈뜸없이 낙관만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돈만 바라보며 사는 것 아닌지 봐야합니다. 제대로 보는 눈이 있어야 비루해지지 않습니다. 신앙인인데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하면 세상의 가치에 사로잡혀 비루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에 옴싹 달싹 못합니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렘5:21).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길 바랍니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으려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알면 못 보던 것을 보게 되고 더 잘 볼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려면 알아야 합니다. 같은 걸 봐도 알고보면 다르게 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앎의 과정을 계속 실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신앙인은 말씀의 각성이 꼭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각성이 없으면 교회 오래 다녔어도 소용없습니다. 말씀으로 놀라는 경험과 깨어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성찰하고 분별력이 생겨야합니다. 깨어남이 없으면 돈과 하나님 중 선택할 때 하나님이 백전백패합니다. 내가 깨어나야 다른사람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이웃을 위로하고 싶어집니다. 나 아닌 너를 보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 아닌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게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경험해 보고, 느껴봐야 합니다. 세상의 불의를 보고 가만있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게 됩니다.

애먼 헤나시(1893~1970)는 일인 피켓 시위의 창시자입니다. 미국 평화 운동가입니다. 한 사람혁명(one man revolution)을 주장했습니다. 애먼 헤나시는 불의한 것을 보면 일인 피켓시위를 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일인 시위를 한다고 세상이 바뀝니까?” 애먼 헤나시가 대답했습니다. “일인 시위로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또한 나를 바꿀 수 없습니다. ” 이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가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눈이 떠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믿음의 눈이 다 열리기 바랍니다. 갈 길 몰라 방황하던 하갈의 길을 보게하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이 우리의 눈도 뜨게 해 주실 것입니다. 눈 뜨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찬란한 믿음의 은혜로운 삶 살기를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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