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5. 주일 설교. 불안한 시대에 읽는 룻기 9: 이름을 잃어 버린 사람(룻4:1~10). 양은익 목사.

 

*설교 영상 뒷 부분이 없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룻 4:1-10)

유난히 추웠던 1월이 가고, 2월 첫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언제나 변함없이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가정마다 넘치기를 바라겠습니다.

1.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 아무개에 대하여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이름을 잃어 버린 어떤 사람’입니다.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가려지고, 이름이 사라진 사람입니다. 1절에 이 사람이 나옵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아무개’가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보아스는 이 사람의 이름을 불렀지만, 룻기서 기자는 이름을 숨깁니다. 밝히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오미 가정의 기업 무를자 1번 순위의 사람입니다. 보아스가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고, 룻의 요청대로 결혼을 하고 싶어도 이 사람이 ‘하겠다’고 나서면 뒤로 물러 설 수 밖에 없는 키맨(Key-man)입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묻습니다. ‘당신이 엘리멜렉의 땅을 사서 기업을 무르겠다고 하면 나는 빠지겠소. 어떻게 하겠소?’(4절), 이 사람이 ‘하겠다’ 그럽니다. 그 때 보아스가 조건 하나를 더 합니다. 밭을 사는 그 날에 룻도 맡아 죽은자의 기업을 이어가게 해야한다(5절). 룻과 계대결혼을 하라는 것인데, 이 사람이 이 조건을 듣더니 거절합니다. 거절한 이유가 6절에 나옵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손해 볼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땅을 사서 기업을 무르면 엘리멜렉의 가문에는 상속자가 없기 때문에 그 땅은 고스란히 자기 아들들이 물려 받게 됩니다. 하지만 계대 결혼으로 룻과 결혼하면 장담 할 수 없게 됩니다. 룻과 결혼해서, 룻이 지금처럼 계속 불임이면 후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만, 만의 하나 룻의 태가 열려 자녀가 생기면 그 아들은 계대 결혼법에 의해 자기 아들이 아니라 엘리멜렉 가문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그가 지불한 모든 게 룻의 아들에게로 가게 됩니다.

룻은 10년간 불임 상태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불임일 확률이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룻과의 결혼을 거절합니다. 이 조건을 듣자 마자 ‘난 못한다. 없던 일로 하자. 당신이 해라’. 도박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돌 다리도 두들겨 보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촉이 대단합니다. 불임이던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습니다. 룻과 결혼했다면 손해 막급했을 것입니다. 주도 면밀하고, 계산이 빠릅니다. 어리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룻기 기자는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이름’입니다. 이름이 있는데도 이름을 가려 버립니다. ‘아무개야’. 그러니까 이 사람은, 앞 가림을 너무 잘해서, 너무 똑똑해서, 계산에 밝아서 이름을 잃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결국 계산에 밝은 ‘아무개’가 버린 카드를 보아스가 삽니다. ‘내가 나오미 기업을 무를 것이고, 룻을 아내로 맞이들여 죽은 자의 기업을 끊어지지 않게 세워 주겠다'(9~10절)

계산에 밝고 주도 면밀한 아무개가 거절한 것을 보아스가 받았으니 보아스는 어리석은 것이고, 바보같은 짓을 한 것인데, 룻기 기자는 바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보아스 처럼 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 기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사실은 이같은 바보가 되기를 원합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성경은 바보같은 사람들로 꽉차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바보들의 세계고, 바보들의 나라입니다. 하나님도 바보, 예수님도 바보, 주님을 따르는 이들도 바보, 바보같은 이들이 보여주는 바보같은 이야기가 성경에 가득합니다. 계산하다가 ‘이름을 잃어 버린 사람’을 보면서 두 가지만 묵상하겠습니다. 왜 신앙인들이 바보가 되야 하는가?

2. 바보 묵상
(1) 바보가 베푼다(6절)
첫 번째 묵상은 ‘바보가 베푼다’입니다. 바보가 되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1절에 나오는 아무개처럼 계산만하고 살면 베풀기 힘듭니다. 계산은 좀 못해도 베풀기 위해서는 ‘선한 바보’가 되야 합니다. 그래야 베풀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주님 말씀(행20:35) 믿고, 베푸는 것이 바보처럼 보여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베품은 의미없는 낭비가 아닙니다. 바보같은 베품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켜 주고, 베푸는 사람으로 변하게 만듭니다. ‘베푸는 바보’는 백번 되도 나쁘지 않습니다. 베품 속에 회복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기쁨이 오고, 희망이 만들어집니다. 기적은 움켜쥠이 아니라 베품 속에서 일어납니다. 움켜쥐면 싸움이지만, 베풀면 싸움이 그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은 ‘베푸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베푸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흘러야 은혜입니다. 고이면 썩을뿐입니다. 잠3:27 말씀 처럼 베푸는 게 지혜입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 베풀 게 있으면 베풀고, 베풀게 없으면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베풀라는 것입니다. 베풀고 싶어도 베풀지 못하는 때가 얼마나 금새 오는지 모릅니다.

‘베풀자’ 그러면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뭡니까?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줄게 없는데. 나도 벅찬데. 베풀야 할 것은 돈만 있는 게 아닙니다. 누가 부처에게 와서 묻습니다. 왜 하는 일마다 되지 않습니까?’, ‘남에게 베풀지 않아서’다. ‘저는 줄게 없습니다’. ‘아니다. 무재칠시(無財七施)가 있다’. 무재(無財), 재물이 없어도 줄 수 있는 7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① 화안和顔, 밝은 미소, ② 언사言辭. 부드럽고 좋은 말. 사랑한다, 수고했다, 감사하다. ③ 心 착한 마음 ④ 眼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 길 ⑤ 身. 몸으로 하는 봉사. 짐도 들어주고, 일도 도와주고. ⑥ 상좌床座 자리를 양보하고, 비워 주는 것. ⑦ 방사房舍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을 내 주는 것. 베풀게 많으니, ‘베풀게 없다’, 핑계만 대지 말고, 베풀라는 것입니다. 베품은 물질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베푸는 바보가 베풀지 않는 똑똑한 사람보다 훨씬 낫다는 것,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2) 바보가 미래다(9~10절)
두 번째 묵상입니다. 바보가 미래다. 베푸는 바보가 있을 때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미래가 열리게 됩니다. 사실입니다. ‘움켜 쥐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베풀줄 아는’ 바보들이 많아질 때 미래가 열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래는 날이 서서 서로 물고 뜯는 미래가 아니라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표범과 어린 염소가 함께 눕고, 젓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되는(사11:6~8) 평화의 미래, 사람 살리는 미래입니다.

인공 지능이 원하는 답을 척척 내놓고,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학력이 높고 똑똑하면 뭐합니까? 이기심 가득한 채 자기만 아는 자들로 가득하게 되면 사상누각, 언제 무너져도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함께 하지 못하고, 계산에 밝아, 자기만 아는 모든 가정, 교회, 사회는 자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룻기서의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이기심으로 가득한 시대고,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어둡고 불행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등장한 사람이 나오미고, 룻이고, 보아스고, 아무개입니다. 룻기서는 효도책도 아니고, 보아스와 룻의 연얘 얘기도 아닙니다. 어두운 사사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미래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열립니까? 바보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열립니다. 텅빈 어머니 따라가는 바보같은 룻, 그런 텅빈 여자, 아무 것도 없는 여자와 계대 결혼을 하는 바보 같은 보아스. 계산에 밝고,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사 시대의 전형적인 인물인 ‘아무개’로는 미래를 열 수 없다. 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를 구하고, 룻을 구하고 보아스를 구한 것은 그들의 똑똑함이 아니라 그들의 바보스러움 이었습니다. 바보 같은 룻이 바보 같은 나오미를 구하고, 바보 보아스가 룻을 구하고 나오미를 구합니다. 이 바보스럼 때문에 그들의 미래가 열립니다. 바보들의 후손에서 다윗이 나오고, 바보 예수가 나와 바보같은 방법, 십자가로 세상을 구하고, 미래를 만듭니다.

예수님이 바보 아니고 뭡니까? 광야 유혹 거절한 것 기억나십니까? 거부 만들어 주겠다, 대권을 주겠다, 신비한 능력을 주겠다. 노다지로 쏟아져 들어오는 성공의 조건들을 다 거절합니다. 바보 입니다. 근데 이 바보스러움으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열어 가십니다.

미래는 하나님 안에 있는 ‘선한 바보’들이 바보스럽게 사랑하고, 베풀고, 섬기고, 누릴 때 만들어 집니다. 미래를 열고 싶으십니까? 계산 많이 하지 마십시오. 바보가 되십시오. 바보는 ‘바로 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남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고, 말할 때 미래가 만들어집니다.

지금도 선한 바보로 살아 오셨지만 하나님 깊게 신뢰하셔서 더 좋은 바보되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은혜와 섬김으로 가득한 바보가 될 때 어둡던 과거는 사라지고, 새로운 미래가 열리게 됩니다. 똑똑해서 이름을 잃어 버리는 불행한 일이 우리에게는 없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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