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8. 주일 설교. 불안한 시대에 읽는 룻기 7: 기쁨의 날 맞으라(룻3:1~6). 양은익 목사.

 

기쁨의 날 맞으라(룻3:1~6)

‘기쁨의 날 맞으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푸시킨의 시에도 이 말이 나옵니다.‘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멋있습니다.

1. ‘위하여’의 마음(1절)
오늘 3장 초반부 읽었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말합니다. 7주간의 이삭줍기가 끝난 어느 날인 것 같습니다. 힘든 이삭줍기로 고생한 룻의 수고를 보면서 나오미가 마음에 담고 있던 얘기를 합니다. ‘얘야,이제 너도 행복하면 좋겠다’ ‘이제 결혼해서 가정을 가져야지’ ‘내가 찾아봤다’. 룻의 재혼 얘기를 끄냅니다. 남편 먼저 보낸 시모가 남편 먼저 보낸 同病相憐의 며느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시모도 며느리도 마음이 어땠을까요?

나오미는 지금 진심입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너도 이제 기쁨의 날을 맞이해야지’. 기쁨을 선사膳賜하고 싶어 합니다. 1절에 보면 나오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위하여’. 보셨습니까?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겠다’(3:1)

‘내가 너를 위하여’. 나오미를 움직이게하고, 룻을 감동시키고, 그들의 삶을 일으켜 세운 힘있는 ‘단어’입니다. ‘내가 너를 위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소중하게 여긴다. 내가 너를 돕고 싶다’. ‘위함’입니다. 격려와 사랑이 가득합니다. 눈물 많은 이들, 서러운 이들, 실패한 이들, 외로운 이들에게 필요한 단어이며, 마음입니다. 위함이 있는 자의 눈에는 아픔이 보이고,눈물이 보입니다. 그래서 온 맘 다해 감싼 안게 됩니다. ‘내가 너를 위해, 힘내’. ‘위함’이 선사(膳賜)되어지면 회복과 희망이 만들어집니다.

‘위하여’가 없는 가정, 교회, 사회, 정치, 경제는 실패의 문 앞에 와 있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위함’이 없이 가정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위함’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정치와 사회가 온전해 질 수 있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위함’이 있으면 환대와 연민, 배려와 사랑으로 풍성해지지만, ‘위함’이 없으면 미움과 냉대와 적대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위하여’는 기쁨과 치유, 회복과 화해를 가져오게 하는 출발이고, 시작입니다. ‘위함’의 아름다운 마음(Beautiful mind)이 삶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위하여’는 사랑이고, 사랑만큼 귀한 것입니다.

3장과 4장에서 일어나는 복된 일은 전부 나오미가 가졌던 ‘위하여’에서 출발한 일들입니다. ‘위하여’가 있었기에 룻의 행복을 원했고, 룻의 행복을 원했기에 시집을 보내게 됐고, 시집 잘 보내려고 ‘모험’을 감행했고, 결국 시집 잘 보내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까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위하여’에서 시작된 기적이고, 신비입니다. 기쁨의 날 맞으려면 ‘위하여’라는 ‘큰 마음’이 필요합니다.

본문을 보면서 ‘위함’에 대해 세 가지 묵상하겠습니다. ① 실패할 때 ‘위하여’를 생각하라(1절) ② 내일이 필요할 때 ‘위하여’를 가져라(2~4절) ③ ‘위함’이 오면 받으라(6절)

2.
(1). 묵상 1: 실패할 때(힘들 때) ‘위하여’를 생각하라.(1절)
첫 번째 묵상입니다. 실패 할 때, 힘들 때 ‘위하여’를 생각하라. 힘들 때, ‘위하여’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힘들면 하나님의 ‘위하심’를 생각하고, 네가 힘들면 가까이 가서 ‘위해’ 주시고. 이 ‘위하여’가 우리를 일으켜 세워줍니다.

타락은 ‘위하여’의 마음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에덴에서 묻습니다. ‘먹지 말라 한 것, 왜 먹었니? 저 여자가 줘서 먹었습니다. 너는 왜 먹었니? 저 뱀이 꾀어서 먹었습니다’. ‘위함’이 사라졌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라멕은 자신의 상처 때문에 사람을 죽입니다. ‘위함’이 없어졌습니다.

‘위하지’ 않고 사는게 ‘위하면서’ 사는 것보다 훨씬 유리해졌습니다. 부끄러운 일인데 부끄러운지 잘 모릅니다.’위하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하면 하나님이 친히 ‘위함’의 모습을 보여 주셨겠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의 위하심은 우리를 일어서게 하는 가장’ 큰 ‘위함’입니다.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이 의사 외아들을 사고로 잃고 나서 한 얘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시련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시련을 겪을 때 대들고 따질 상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저 만만한 건 신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번 고쳐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한 말씀만 하소서, 박완서)

그렇게 하나님께 대들고 따지다가, 선생이 놀랍니다. 하나님이 먼저 ‘성자’(자식)을 죽이셨다는, 늘 들었지만 흘려들었던 십자가 사건이 가지는 온전한 뜻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아시겠구나!!’ 하나님은 가장 크게, 가장 깊게, 우리를 위하십니다. 하나님의 ‘위함’이 보일 때,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될 때 그 마음에 생기를 얻어, 내 옆에 있는 타자의 아픔을 ‘위해’ 줄 수 있습니다.

2장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위함을 알게된 나오미가 룻의 아픔을 보게 됩니다. 죽은 남편의 나라 와서, 홀로된 시어머니 봉양하기 위해 매일 밭으로 나가 보리 이삭을 주워오는 며느리를 볼 때 눈물이 핑 돕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윤복희)을 부릅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내가 너의 벗 되리, 너는 나의 기쁨이야’.이 마음 아니었을까요? ‘여러분’은 명곡입니다. 실패할 때 ‘위하여’는 나를 일으키고, 서로를 일어나게 만듭니다. 묵상하여 마음에 새깁시다.

(2) 묵상 2: 내일이 필요할 때 ‘위하여’를 가져라(2~4절)
두 번째 묵상입니다. ‘내일’의 희망이 필요할 때 ‘위하여’의 마음을 가져라. 묵상하시고, 이 마음 꼭 가지기 바랍니다. ‘위하여’는 ‘내일’을 만들고, ‘미래’를 만들고,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희망’을 선사해 줍니다. 좋은 내일, 희망찬 내일을 가지려면 ‘지금’ ‘위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위함’이 내일이라는 길을 열어줍니다.

김현승 시인은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을 ‘빛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러케 내일을 맞으련다. 모든 것을 실패에게 주고, 비방은 원수에게, 사랑은 돌아오지 못하는 날들에게. 나의 잔에는 천년의 어제보다 明日의 하로를 넘치게 하라’(김현승, 내일, 부분, 1946)

해방 직후 1946년, ‘내일’이 포기된 시대에 ‘내일’을 말합니다. 아무리 절망스럽더라도 ‘내일’을 포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내일을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서로 위할 때 ‘내일’에 밝은 빛이 비칩니다. ‘위함’이 없으면 좋은 미래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오미 보십시오. 룻을 위하는 마음이 생기자 룻의 내일, 룻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룻이 행복할까? 나 죽은 후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나오미의 결론은 안식할 곳, 가정이었습니다. ‘좋은 신랑 만나게 하자’. 룻은 좋은 신랑을 만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동남아 여자입니다. 가난합니다. 결혼 경험도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삽니다. 불임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좋은 혼처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오미가 신랑을 점찍어 놓고 밀어 붙입니다. 이 장면은 오늘 다루지 않겠지만, 나오미는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룻을 보아스에게 보냅니다. ‘넌 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그러면 보아스가 알아서 할거다’. 룻을 위하기에, 룻의 내일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1802~1885)의 말입니다. ‘미래는 여러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약한 자들에게는 불가능이고, 겁 많은 자들에게는 미지이고, 용기있는 자들에게는 기회다’ 나오미가 가진 미래의 이름은 ‘기회’입니다. 룻의 밝은 내일을 위해 ‘기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위함’이 있을 때 기회가 만들어지고, 내일이 밝아집니다. 자녀, 남편, 부인, 교회, 나라 다 똑같습니다. 내일이 필요하면 ‘위하여’를 놓치지 마십시오. 작은 ‘위함’이라도 만들어 내야 됩니다.

(3) 묵상3: ‘위함’이 오면 받으라(5~6절)
세 번째 묵상입니다. 세 번째 묵상은 ‘위함’이 오면 거절하지 말고 받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위함’도 있고, 수상한 ‘위함’도 있기에, 모든 ‘위함’을 다 받아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받아야 하는 ‘위함’은 거절하지 말고 받아야 합니다.

5절과 6절에 보면 룻이 나오미의 ‘위함’을 그대로 다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룻이 말합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다 하겠습니다’.(5절). 그리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그대로 다합니다(6절). 쉽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존심 상할 수도 있고, 일이 잘못되면 음행한 여인으로 오인받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위험 천만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그대로 다합니다. 다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나오미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는 자(Giver)와 받는 자(Taker)의 관계에서 주는 자(Giver)는 믿음(신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받는 자(Taker)도 거부하지 말고 주는 자의 ‘위함’을 흔쾌하고 감사하게 받는 게 좋습니다. 그 받음이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위하여’라는 말 오늘 아침 생각해 봤습니다. ‘위하여’의 마음 많이 품으셔서 기쁨의 날 맞이하고, 기쁨을 선사하는 복된 인생, 누리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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