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이긴 동행(룻1:7~14)
돌아가신 정채봉 선생의 시 한편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울지 마, 울지 마, 이 세상의 먼지 섞인 바람 먹고 살면서 울지 않고 다녀간 사람은 없어. 세상은 다 그런거야. 울지 말라니까!’(세상사, 정채봉) 울지말라는 선생의 위로가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울일 많은 세상이기에 울겠지만 그래도 울지 말고 이겨 내라는 것이겠지요.
오늘 읽은 본문에도 부둥켜 안고 소리 높여 우는 이들이 나옵니다. 우는 이들은 나오미고, 나오미의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입니다. 우는 곳은 모압과 유다 땅 국경선이고, 우는 이유는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울고 있습니다. 시어미는 나 혼자 갈테니 너희들은 가라 하고, 그들은 가지 않겠다고 하고. 이렇게 이들은 이별 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처지가 한스러워서 서로 부둥켜 안고 소리 높여 울고 있는 중입니다.
저도 옆에 있으면 말해주고 싶습니다. ‘울지 마세요’. 이 사람들이 9절과 14절에서 두 번씩이나 소리 높여 우는 것은 그동안 서로 깊게 의지하고, 정을 쌓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들은 슬픔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남편이 없으면 안되는 세상에서 나오미의 남편도 죽고, 오르바의 남편도 죽고, 룻의 남편도 죽었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막막하고, 불안한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은 불안하고, 막막하면 거칠어 지기 쉬운데 이 세 여인을 보면 놀랍게도 거칠어 져 있지 않습니다. 큰 슬픔과 불행이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외면 대신에 ‘직면합니다’. 힘든 삶을 ‘서로 함께’(=동행, 동거) 하면서 ‘직면해’ 나갑니다.
두 아들이 죽은 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오미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복음의 소식을 듣고 모압 땅을 떠날때까지 그들은 한 집안에서 서로 의지하고, 선대하면서 오늘 제목 처럼 ‘슬픔을 이긴 동행’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동행했기에 울었고, 동행했기에 이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동행’이라는 단어 오늘 아침 새기면 좋겠습니다. 눈물 흘리는 자들에게 필요한 단어입니다. 동행 속에 불안과 슬픔을 이기는 회복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창4:9에 보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동행을 끊어버린 가인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뜨끔한 질문이 나옵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니’ 동행해야 할 이들과 동행하지 않을때 하나님이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네 남편 어디갔니?’ ‘네 아내 어디갔니’ ‘난 모르는데요’(창4:9). 이러지 않아야 합니다.
동행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작은 연못’ 노래처럼 되 버립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작은 연못에 붕어 두 마리가 살았습니다. 사이 좋고 지내다가 서로 싸우게 되는데 그만 칼 부림까지 일어나 한 마리가 죽게 됩니다. 죽은 한 마리로 물이 썩게 됩니다. 썩은 물 때문에 죽인 물고기도 죽게 되고, 작은 연못에는 아무도 살 수 없게 됐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빗대 이야기입니다. 동행해야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부둥켜 안고 우는 모습이 많이 부럽습니다.
슬픔과 고난을 이겨나가는 세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만 묵상하겠습니다.
1. 동행자를 만들라
첫 번째 묵상은 ‘동행자를 만들라’입니다. 동행이 중요하면 ‘동행자’가 있어야 합니다. 동행의 유익을 말하는 전도서 4장(4:9~12)의 말씀처럼,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습니다. 함께 일하면 일의 결과가 더 좋습니다. 넘어지면 일으켜 줄 수 있고, 함께 누우면 따뜻하고, 홀로 세상에 맞서는 것보다 함께 맞서는 게 훨씬 더 단단합니다.
나오미가 큰 슬픔과 약함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동행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동행자가 누구인지 보셨습니까? 하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두 며느리입니다. 둘 다 나오미의 동행자였고, 나오미를 무너지지 않게 해준 힘입니다.
13절에 보면 나오미의 탄식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 그 동안 겪은 일이 너무 크고 힘들었기에 내뱉는 말이지, 하나님을 부정하는 항변이 아닙니다. 8절과 9절에서 나오미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로하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동행하려고 애쓰는 자의 고백이고, 축복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나오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상대화입니다. 국경선이 가까워오자 나오미는 마음에 담고 있었던 얘기를 동행하고 있는 두 며느리들에게 합니다. ‘나랑 같이 가지 말고 고향 땅 너희들의 어머니집, 친정으로 가라. 나는 너희들이 아무 것도 없는 나와 함께 가서 힘들게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새 사람 만나 잘 살기 바란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하는게 아니라 진심입니다.
11절, 12절, 13절에 연속해서 나오는 ‘내 딸들아’라는 호칭 보셨습니까? 사이가 나빴다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동행했기에 가능한 말입니다. 나오미도, 두 며느리도 슬픔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은 ‘동행’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고, 서로가 동행했습니다. 동행자들과 함께 하면서 슬픔과 암울한 미래를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강하면’ 불편한 동행자 뭐하러 만듭니까? 하지만 사람은 강하지 않습니다. 힘 없고 약한게 죽기보다 싫지만 우리는 강하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가 약합니다. 안다면 동행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일번 동행자는 하나님이시고, 이번 동행자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일번 동행자인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하면 사람과의 동행도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림 절기를 보내고 있지만, 하나님은 ‘동행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동행자입니다. 성부 하나님으로, 성자 예수님으로, 성령 하나님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시고, 동행하십니다. 우리는 이 기적같은 동행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동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수1:9에 여호수아에게 하신 동행의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새번역) 동행자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동행자는 누구입니까? 선명하고 분명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동행자로 만드십시오. 사랑하는 이들과 더 깊게 동행하십시오. 매순간 이기게하는 힘을 줄 것입니다.
2. 동행의 마음을 키우라.
두 번째 묵상입니다. 두 번째 묵상은 ‘동행의 마음을 키우라’입니다. 동행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동행은 물건너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마음이 동행에 필요하겠습니까? 두 가지만 보겠습니다. 믿음과 선대함. 둘입니다. 하나님과는 믿음으로 동행하고, 사람과는 선대함으로 동행하면 됩니다.
(1) 믿음
믿음은 모든 동행의 기본 조건이고, 마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동행은 힘듭니다. 믿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잠깐은 필요에 의해서 동행하는 척 하겠지만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동행자로 만들고 싶으면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히11:6 기억해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은 사람이 가져야 하는 절대적인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상 주시는 약속을 깊게 믿을 때 슬픔과 시련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하나님과의 감격적이고, 아름다운 동행이 이루어 집니다.
(2) 善待
동행의 마음 두 번째는 8절에 나옵니다. ‘善待’라는 단어입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 할 때 쓴 단어입니다. 나오미가 말합니다.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한다’ 며느리들이 죽은 남편들에게 잘하고,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에게도 고맙게 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잘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자신에게 잘해주었다고 하지만 며느리들만 잘했겠습니까? 나오미도 며느리들에게 잘했을 것입니다. 서로 잘했던 것입니다.
‘선대’는 동행자들의 근본 마음입니다. 잘해주고, 고맙게 여기고,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게 전부 선대의 마음입니다. 저는 선대를 ‘어진 마음’으로 풀어 봤습니다. 너그럽고 착한게 ‘어짐’인데 얼마나 귀한 마음입니까? 세상은 우리의 어짐을 자꾸 뺏아 가지만 뺏기지 않아야 합니다. 어짐이 있을때 ‘동행’이 일어납니다.
‘어질면’ 동행하고, ‘모질면’ 갈라섭니다. 모질때도 있어야 하겠지만 모짐으로는 동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들은 모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진 마음은 어디서 올까요? 한자말로 하면 易地思之에서 오고, 요즘말로 하면 너에 대한 共感에서 옵니다. 易地思之는 입장바꿔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 입장만 보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 형편, 감정까지 헤아려 보라는 것이 역지사지입니다.
우리는 我田引水(=자신을 먼저 챙기고 행동하는 것)는 잘하지만 역지사지는 잘못합니다. 역지사지를 못하면 ‘어질어’지지 못하고 ‘모질어’집니다. 동행이 즐겁지 않고, 피곤해 집니다. 동행을 막는 거대한 장벽이 ‘편견’인데, 편견의 장벽은 易地思之의 어진 마음, 긍휼과 공감, 선대함이 있을 때 깨지고, 극복 할 수 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나오미는 신랑을 잃은 두 며느리들을 보면서 易地思之 한 것입니다. 며느리들 또한 신랑을 잃고 나서 同病相憐의 마음으로 나오미를 바라보게 됩니다. 서로 얼마나 애뜻했겠습니까?
두 며느리 중에서 첫째 며느리 오르바가 돌아가지만 오르바가 돌아갔다고 해서 동행을 끊은 것은 아닙니다. 나오미의 간곡한 설득에 의해서 돌아가지만 여전히 어진 마음으로 나오미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오히려 룻이 사람들의 예상과 상식을 깨고 돌아가지 않고, 계속 동행합니다. 대단히 특별한 일을 한 것입니다. 룻이 축복을 받은 이유입니다. 룻의 자손에게서 다윗이 나오고, 메시아가 탄생합니다. 더 나아가 룻의 이름이 성경의 이름이 됩니다. 모세가 유명하고, 다윗이 유명하지만 성경에 모세기도 없고, 다윗기도 없습니다. 근데 룻은 자기 이름으로 된 성경까지 가지게 됩니다. 특별한 동행이 특별한 축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동행은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어진 마음으로 나 아닌 타자들과 동행하면 그 동행이 슬픔과 고난을 이겨내게 하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동행자로 오신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 주일 아침입니다. 동행의 아름다움이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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