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시대에 읽는 룻기1: 슬픔이 왔다(룻1:1~6)
룻기는 잘나가는 사람들의 얘기가 아닙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지 모르는 불안한 환경속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룻기서의 주인공들입니다. 나오미가 그렇고, 룻이 그렇습니다. 참 힘든 사람들이었는데 ‘살아냅니다’. 불안하지만 살아내고, 슬프지만 주저 앉지 않고 살아냅니다.
룻기서의 처음은 슬픔과 눈물 범벅이었는데, 나중에는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잃어버렸던 것을 채워 나갑니다. 어떻게 살아냈는지, 어떻게 이겨 냈는지 주의 깊게 살펴 볼만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룻기서의 시작 부분이지만, 룻기서에서 제일 힘든 장면입니다. 불안과 공포가 있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아픔과 슬픔이 짧은 절 안에 가득합니다.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불안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라지지 않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게 하는 기분 나쁜 불청객으로 여전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나라와 세계에 스며들어 위협하고, 아프게하고, 슬픔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룻기서는 불안과 함께 시작하고 있고, 오늘 제목 처럼 슬픔이 오며, 그런 슬픔 속에서 슬픔을 이겨 나가는 사람들, 슬픔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돕는 이들의 자비와 은혜가 아침 이슬 처럼 반짝이는 ‘슬프면서 아름다운 책’입니다.
힘든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묵상하겠습니다. 불안과 공포, 슬픔이 많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묵상입니다.
1. 슬픔이 있다(1~5절)
첫번째 묵상입니다. 슬픔이 있다. 묵상하십시다. 슬픔은 없지 않고 있습니다. 슬픔이 오지 않으면 없겠지만 슬픔은 오기에 슬픔은 있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에 슬픔이 왔기에 슬픔이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슬픔이 택배로 왔다고 말합니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정호승, 택배, 부분)
실감나는 현실입니다. 밥이나 먹고 사는 평범한 늙은이 한테도 슬픔은 지금도 택배로 계속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슬픔은 오고, 슬픔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6명입니다. 나오미 부부, 나오미의 두 아들 부부인데, 6명 모두 ‘슬픔’이 가득합니다. 심각한 기근으로 고생하는 가족들을 바라보는 가장인 엘리멜렉의 감춰진 눈물이 있습니다. 살려고 떠난 길에서 살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보면서 흘렸을 나오미와 두 아들의 눈물과 슬픔은 얼마나 진했을까요?
그뿐입니까? 두 아들과 결혼한 앞길이 창창한 두 며느리가 젊디 젊은 신랑의 죽음 앞에서 흘리는 눈물과 슬픔은 또 얼마나 서럽고, 깊었겠습니까? 어미 나오미의 눈물은 모르긴 몰라도 하염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보낸지도 모르는 슬픔이 ‘택배’로 와서 살아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이 엘리멜렉인데, 얼마나 책임을 다한 아버지고, 남편입니까?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기에 엘리멜렉은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쉽지 않은 난민의 길을 결단하고 떠났습니다. 늙은 나이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남기고 남의 땅에서 죽습니다. 사고 아니면 병들어 죽었겠지요. 이름 한 줄 밖에 나오지 않기에 우리는 엘리멜렉을 잘 모르지만 책임을 다한 아버지고, 그래서 더 가슴을 울리는 슬픈 죽음을 죽은 것입니다. 그 남편을 보내는 나오미도 슬프고, 다 슬픕니다. 슬픔은 오고, 슬픔은 있습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불안이 있고, 어떤 슬픔이 있습니까? 슬픔이 택배처럼 오면 어떻게 하셨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슬픈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슬픔은 오고, 슬픔은 있습니다.
슬픔은 삶의 상수(常數)입니다. 슬픔이 상수이기에 슬픔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살전5:16). 맞는 말이지만, 슬픔을 아는 사람이 이 기쁨을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슬픔과 아픔을 모르는 기쁨은 자기만 아는 값싼 기쁨 밖에 될 수 없습니다.
슬픔이 많다면 슬픔을 공부해야 합니다. 슬픔을 이해하고, 슬픔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슬픈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타인의 슬픔에 무감각하고, 지겨워하는 것은 슬픔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자들의 모습은 될 수 없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눈에 눈물이 어리면 하늘 나라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함께 슬퍼하고, 함께 눈물 흘리는 곳이 하늘 나라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슬픔이 사랑보다 소중하기에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너에게 주겠다고 노래합니다. 슬픔의 시인 김현승 선생은 슬픔은 우리를 목욕시켜 깨끗하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슬픔은 소중합니다. 낭비하면 안됩니다. 가진 슬픔을 마음에 품고, 슬픔이 주는 뜻을 알아 갈때 주저 앉지 않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2. 슬픔이 있어도 ‘살아내자’(6절)
두 번째 묵상입니다. 슬픔이 있어도 살아내자. 깊게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슬픔에 지지말고 일어서야 합니다. 슬픔이 있어도 살아내고, 일어서라는 것이 룻기가 던져주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슬픔이 깊었지만 나오미도 일어났고, 두 며느리들도 일어났습니다.
5절과 6절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슬픔 속에 세 과부가 함께 살아갑니다.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6절에 보면 세 과부 전부 일어나 모압을 떠나 시어머니가 떠나온 곳, 미가서 5:2에서 장차 예수님이 나실 곳으로 예언되어지는 유다땅 베들레헴 에브랏(2절)으로 돌아갑니다.
일어서게 된 동기는 나오미가 들은 소문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나오미는 놀랍게도 이 소문에 마음을 엽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고?!’ 나오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냉소적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여호와께서 돌보신다는 소식에 마음을 엽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것은 복음입니다. 나오미는 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돌보신다면 내가 떠나온 그곳,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일어서기 시작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슬픔이 깊으면 담을 쌓고, 연을 끊을려고 하는데 감사하게도 나오미와 두 명의 며느리들은 주저 앉아 있지 않습니다.
‘진지함’이라는 단어 하나 오늘 드리겠습니다. 진지하다는 것은 어떤 일을 대하는 태도가 대충대충이 아니라 성실하다는 것입니다.진지함은 삶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을 정드로 중요한 마음이고 태도입니다. 슬픔이 깊어도 진지함을 잃지 않으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진지함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슬픔 속에서 진지한 사람은 나를 생각하고, 너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내가 무너지면 안되겠구나!. 내가 무너지면 나만 무너지는게 아니구나!
슬픔의 시간에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성실하고, 진지하게 살아갈 때, 진실한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반응할 있습니다.
슬픔을 당하면 희망이 필요한데, 희망은 진지함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에게 옵니다. 희망은 누가 주는 게 아닙니다.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생기는 하나의 ‘사태’입니다. 희망을 아무리 말해도 희망이 없다고 믿으면 희망은 없습니다.
슬픔이 깊을수록 삶에 진지해져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더 진지해져야 합니다. 말씀에 진지해져야 하고, 하나님에 대해 진지해져야 합니다. 이같은 영적인 진지함이 불안과 슬픔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잘못된 삶을 바로 잡아 줍니다.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낙심하는가?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 하는가? 하나님을 기다리리라. 나를 구해 주신 분, 나의 하나님. 나는 그를 찬양하리라’(시42:5. 공동)
진지한 자의 고백입니다. 슬픔과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최고의 힘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백성의 슬픔을 아시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룻기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나오미, 룻, 엘레멜렉 같은 가장 연약한 자들, 깊은 슬픔 속에 있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대충보지 말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보라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에 진지해지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의 공기는 싸늘합니다. 흉년입니다. 먹을게 없어서 흉년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흉년입니다. 불안과 공포가 떠돌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소리 소문없이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불안한 세상은 슬픔을 만들고 있고, 슬픔의 거친 파도는 지금도 계속 오고 있습니다.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최고의 방어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고, 슬픔 나를 위로해 주시고, 무너진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시는 분은 우리의 눈물과 슬픔과 고통을 알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슬픔만 있지 않습니다. 불안만 있지 않습니다. 주 안에는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대림의 계절에 오신 주님을 깊고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불안과 슬픔에서 일어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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