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8. 주일 설교. 해질녘에 읽는 요한일서 묵상 13: 아바에게 받은 교훈대로(요일3:4~12). 양은익 목사. 어버이주일

 

아바에게 받은 교훈대로(요일3:4~12)

1.
암으로 투병하는 아버지의 힘듬을 본 아들 기자의 한 마디입니다. ‘내게 아버지는 사고가 난 뒤에야 열어보는 블랙박스 같은 존재였다’ 무심했다는 것이지요. 어버이 주일인 오늘, 닫혀있던 블랙박스를 열어보는 뜻 깉은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묻습니다.

너 올해 몇 살이니? 15살요.
엄마는 지금 몇이신데? 15살요.
임마, 네 엄마가 너하고 쌍둥이란 말이냐?
엄마는 저를 낳고 나서야 엄마가 되었데요.
아빠두 맨날 제 덕분에 아빠 되었다고 하세요.
그래그래 자식이 부모를 키워주지
평생이 걸리지만 부모 되게 해주지
(유안진, 자식의 은혜)

부모의 은혜가 아니고 자식의 은혜를 말합니다. 부모만 자식을 만드는 게 아니고, 자식도 부모를 만든다는 것이겠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지어지는 것(엡2:22)처럼 부모와 자식도 함께 지어져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가족에 대한 부담감이 많은 시기이기에 더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2.
어버이 주일인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아바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아바의 자녀’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연로한 사도 요한이 아바의 마음을 가지고 전해주는 당부와 가르침이기에 아바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비와 어미는 ‘교훈하는 자’입니다. 자신은 잘못해도 ‘잘하라’ 말하는 게 부모입니다. 잔소리로 들릴 때가 있지만 철 들면서 잔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모 공경은 ‘잘 듣는’데서 나옵니다. 어떤 ‘잔소리’를 많이 들으셨습니까? ‘어떤 소리’를 많이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아바의 자녀인 부모들이 해야 하는 모든 교훈과 가르침의 근본이 되는 교훈이 나옵니다. 4절. 죄짓지 말라. 12절. 가인같이 하지 말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아바의 교훈 1: 죄짓지 말라(4절)

4절 입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불법’은 아노미아(anomia,ἀνομία), ‘법이 없다’(=무법)는 말입니다. 아노미, 아나키즘, 아나키스트가 여기서 나온 단어들입니다. 어떤 지배와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무법의 상태가 죄입니다.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권위와 뜻에 저항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이라는 권위의 부재, 초월의 상실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못할 게 없습니다.

하여 요한은 말합니다.  ‘죄짓지 말라’. 7절. 죄에 속지말라. 죄가 지배하면 10절, 의가 사라지고, 사랑이 사라진다. 죄 대신 6절.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7절, 의를 행하라. 교훈 합니다. 

늘 듣는 말 같지만 사라져 가고 있는, 하기 쉽지 않은 말입니다. 사도 요한의 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죄의 댓가가 사망(롬6:23)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했을 것입니다. 죄는 죄를 낳고, 더 깊고 아픈 죄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은 몰라도 우리는 죄를 가볍게 보면 안됩니다.

죄는 사람을 망가지게 만듭니다. 추하게 하고, 뻔뻔하게 만듭니다. 비겁해집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죄가 다 망가트립니다. 어떤 죄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죄지은 후에 아담과 하와의 모습 보십시오. 변명하고 책임 전가하고, 숨기 바쁩니다. 보배롭고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다 무너트립니다. 이런 저런 말 하지만 초라하고, 궁색합니다.

죄로 지갑을 채울 수 있습니다. 쾌락도 누리고, 권력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존귀함은 무너집니다. 우리 자녀들이 훗날이라도 죄와 타협하다 이런 인생 살지 않도록 깊게 기도하십시다. 우리는 교훈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죄짓지 않게 하소서. 죄를 이기게 하소서. 존귀한 삶을 살게 하소서’ 죄짓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들, 우리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아바의 교훈 2: 가인 같이 하지 말라(12절)

아바의 교훈 두 번째는 12절에 나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은 형이고, 아벨은 그의 친동생인데, 친형이 친동생을 죽였습니다. 죽인 이유가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벨이 잘못해서 죽인게 아니라 의로웠기 때문에 죽입니다. 터무니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입니다. 두 아들 중에서 누가 봐도 잘난 아들은 ‘가인’입니다. 가인은 이름 부터가 ‘전문가’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사람입니다. 직업도 그 당시의 스타트 업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에 종사하면서 부모의 기대대로 새로운 문명을 열어가는 성공한 전문인이었습니다. 동생 아벨은 펑범합니다. ‘덧없다’는 뜻을 가진 이름을 보면 기대를 받지 못한 게 보입니다. 직업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양치기입니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납니다. 두 형제가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성공한 형의 제사는 하나님이 거부하고, 별볼일 없는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십니다.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가인이 분노합니다.하도 티나게 화를 내니까 하나님이 경고까지 하십니다. 죄를 다스려야 한다(창4:7) 자신의 제사가 왜 거부 당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게 먼저인데도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거부 당한 것만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쁩니다. 성공은 했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인의 제사는 피 흘리는 동물 제사를 하지 않아서 거부 당한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신 것은 정신 차리라는 Sign입니다. 그 때까지의 가인의 삶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제사는 드리고, 예배는 드리지만 가인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바빠서 그랬는지, 관심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가인에게는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매일의 삶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예배가 없었습니다. 그같은 삶의 결과가 만들어낸 사건이 ‘살인’입니다. 그것도 동생을 말이지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없는 가인은 사나워져 있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라고 ‘거부’하신 것인데도 알아 차리지를 못합니다.

3.
삶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모습을 쉽게 보지 마십시다. 하나님이 없으면 ‘자존심’만 남습니다. 자존심으로만 삽니다. 내가 어디 출신인데, 왕년에 수능이 몇점인데, 어디 다니는데. 자녀도, 부모도 이런 걸로만 삽니다. 그 이상이 없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분노와 시기 가득한 성품으로 무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공한 가인’이 보여준 초라함입니다.

요한은 이런 초라하고,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가인 같이 하지 말라’ 말했던 것입니다. 가인에게는 성공과 성취만 있었지 하나님과의 깊은 예배, 사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었고, 초월이 없었습니다. 가인은 실패했습니다. 가인의 모습을 보면서 아바의 자녀들은 성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아바의 자녀들에게 ‘죄 짓지마’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한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 말을 해줘야 합니다. ‘가인 같이 하지마, 하나님 잃어 버려’, ‘죄짓지마, 존귀함 잃어 버려’ 이런 마음으로 자녀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어버이 주일입니다. 블랙박스 활짝 열어 한없이 크고 높은 어버이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리십시다. ‘아바에게 받은 교훈’ 잘 받고, 전하면서 살아가는 복된 인생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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