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15. 주일설교. 해질녘에 읽는 요한일서 묵상14: 사랑의 용기(요일3:13~18). 양은익 목사.

 

사랑의 용기(요일3:13~18)

1.
오늘 요한일서 묵상은 미움과 사랑입니다. 말씀 제목은 ‘사랑의 용기’로 잡았습니다. 흔히 듣는 두 단어지만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두 축입니다. 당연히 미움보다는 사랑이 많아야 합니다. 하지만 미움보다는 사랑이 어렵습니다. 말씀 제목처럼 용기가 필요합니다.이 노래 기억나십니까?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공감이 가십니까? 이 노래 들으면서 ‘아니다’ 그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랑에 용기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묵상할 사랑으로 사랑에 대한 이해가 새로워지고, 다시 사랑을 만들어가는 ‘용기’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2. 사랑은 무엇인가?
(1) 미워하지 않는 것(13~15절):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움 많은 세상에서 미움만 없어도 사랑입니다. 미워하기 시작하면 사랑은 죽고, 사랑은 시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미움을 죽여야 합니다. 미움은 ‘싫어 하는 마음’이기에 미움이 많은 사람은 사랑에 취약합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면, 미움은 만악의 근원입니다. 미움이 들어오는 순간 죄가 시작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미움입니다. 자기 보다 한참 모자란 듯한 아벨이 인정 받는 것을 보면서 미움이 나오고, 급기야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15절에 ‘미워하는 자가 살인한다’는 얘기는 가인의 얘기입니다. 하여 요한 사도가 13절에서 말합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미워하는 일이 생길텐데 그렇다고 가인처럼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워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14절에서 얘기합니다.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이기에, ‘구원받은 자들’이기에, ‘하나님이 있는 자들’이기에 사람들이 미워해도 미움을 이겨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움을 이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미움은 괴물입니다. 정말 괴물입니다. 어느 정도로 괴물입니까? 진실도 상관하지 않고, 없는 사실도 있게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랑과 공감도 미움을 만듭니다. 사랑이 과할수록, 공감이 깊을수록 이상합니다. 미움이 나옵니다. 내 편에 대한 사랑과 공감이 너무 쎄서, 다른 편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게 아니라 혐오하고 증오까지 합니다. 과잉된 사람과 과잉된 공감이 만들어낸 치명적인 병입니다. 내 자식, 내 가족, 내 편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 좋은 사랑이 아차하는 순간 타자에 대한 미움으로 변해 버린다면 잘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은 이런 편향된 미움을 버리고, 고치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사랑은 경계를 넘고, 담장을 넘어갑니다. 사람의 감정을 깊게 관찰한 마사 누스바움이 미움에 대해서 한 말입니다. ‘희망은 미움(혐오, 심한 증오)을 멈추는데서 시작한다’. 우리에게 절실한 말입니다. 미움을 버리지 못하면 자신도, 가정도, 사회도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을 말하려면 미움부터 멈춰야 합니다. 미워하지 않는 게 사랑이고, 사랑의 출발입니다.

좀 더 센 주문을 한다면 사랑은 ‘미워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싶은데 미워할게 없습니다. 미워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보다 더 고수입니다. 할수만 있으면 하고 싶습니다. 미움이라는 괴물은 진리의 허리띠, 정의와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싸워 물리쳐야 합니다. 미움을 이겨서 사랑을 얻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을 따라 가는 것(16절)
사랑은 무엇인가? 주님을 따라 가는 것, 주님을 본 받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만 가진 사랑의 정의지만 대단히 탁월하고 뜻깊은 정의입니다. 주님 따라가면 사랑이 나옵니다.

16절입니다. 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안에 사랑의 기원, 사랑의 실천, 사랑의 방법까지 고스란히 나와 있습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 미워하지 않게 만드는 것도 대단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주님처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면 그 사랑은 더 대단한 사랑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고백합니다. 자신은 목숨을 버리신 주님을 보면서 비로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사랑이었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 사랑을 ‘받은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누가 사랑을 쉽다고 하겠습니까?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비장감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사탕 발림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주님을 따라 하는 데서 오는 ‘비장한 사랑’ 일 수 밖에 없습니다. 희생이 있고, 섬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비장한 사랑이 사람을 위하는 사랑이 되고, 사람을 살리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5:2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깊게 품는데서 부터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한 마디 안에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교회다움이 무엇인지가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 ‘그 마음을 따라가는 것’ 그게 성도고,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가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마음이 있을 때 사랑도 나오고, 믿음도 나오고, 관용이 나옵니다. 어떤 것보다 귀한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이 마음 얻고 싶습니다. 이 마음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어떤 일로 힘들어 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깊게 받아서 사랑으로 이겨 나가시기 바랍니다.

(3) 연동하는 것(18절)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페어링(pairing)입니다. 페어링은 기계끼리 연결하고, 연동하는 것입니다. 핸드폰이랑 컴퓨터랑 페어링하면 서로 다른 기계지만 하나되서 함께 쓸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너와 내가 연동하는 것입니다. ‘아프니, 나도 아파.’ 이 마음이 있을 때 사랑이 나옵니다. ‘아프니, 난 하나도 안 아파’. 사랑은 물건너 갑니다.

18절 보십시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숱하게 듣는 말이지만 잘 하지 못하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과 내 마음이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를 보고 랍비에게 가서 물어 봤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랍비가 말합니다. 뜨거운 물을 한 쪽 머리에 부어봐라. 그래서 반대쪽 머리에서 ‘앗뜨거’ 소리가 나오면 한 사람이고, ‘아, 고소하다’ 그러면 두 사람이다.

사랑은 연동입니다. 너가 뜨거우면 나도 뜨거워야 사랑입니다. ‘연동하는 마음’, ‘함께 하려는 마음’이 말과 혀로만 하는 형식적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합니다. ‘말로 하는 사랑’에서 ‘하는 사랑’으로 넘어가려면 ‘페어링’이 되야 합니다. 연동의 마음이 사랑을 만듭니다. 당신 슬프면 나도 슬프고, 당신 기쁘면 나도 기쁘고. 이 마음 잃어버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보신 것 처럼 사랑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워하지 않아야 하는 용기,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비장함, 나와 다른 너와 연동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사랑의 용기를 가지고 미움 가득한 세상이지만,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오늘 아침 축복하고 축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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