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17. 주일 설교: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고전15:55~58). 양은익 목사. 부활주일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고전15:55~58)

1.
꽃 만발한 계절에 맞이하는 부활 주일 아침입니다. 하늘에서 부터 오는 부활의 환호성, 크게 들리면 좋겠습니다. 이해인 시인은 부활 주일 아침에 ‘부활하신 당신을 닮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을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감추어 둔 향기를
아낌 없이 쏟아내는
4월의 꽃나무들처럼
기쁨을 쏟아내며
우리는 모두
부활하신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생명의 수액을 뿜어올리는
생명나무이고 싶습니다.
(이해인, 어서 빛으로 일어나)

여러분들 모두, 4월의 꽃나무 되서, 부활하신 주님처럼 생명의 수액을 뿜어내는 ‘싱싱한’ 생명 나무되기를 축복하고 축원드리겠습니다.

2.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입니다. 1장 펴자마자 파벌 얘기가 나옵니다. 3장, 4장에는 자신이 가진거 가지고 유세를 떠는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5장에는 계모와 간음하는 사람 얘기도 나옵니다. 6장에는 고소와 고발과 음행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7장에는 불륜의 모습, 8장에는 우상 숭배, 9장에는 지도자인 바울을 비하합니다. 12장에는 받은 은사를 가지고 교회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문제 투성입니다. 그리고 15장이 나오는데 15장은 여러분들 잘 아시듯이 부활장입니다.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말하다가 왜 갑자기 부활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바울이 부활 얘기를 하는 것은 그들이 부활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부활을 알기에 다시한번 부활의 사실을 각인시켜 부활할 사람으로 살라는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활의 사실성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을 믿는 이들이 살아내야 하는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은 부활의 사실과 부활의 삶이 합해질 때 부활입니다. 부활을 안다고 하면서 고린도교회 사람들 처럼 분쟁과 음행의 삶을 산다면 부활은 안다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알고, 믿는 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자부심이고, 자존심이고, 자신감입니다. 부활은 우리를 대인배로 만들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부활을 아는 사람은 넉넉하고, 멋있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사실이 그렇게 만듭니다.

3.
부활은 그때까지의 사람들의 사고와 판도와 삶을 바꿔 버린 엄청난 게임체인저입니다. 부활 전까지 사람들이 생각했던 인생의 사이클, 순환은 생로병사(生老病死)였습니다. 태어나, 나이들고, 병들어, 죽는다. 이 사이클 말고는 없었습니다. 이 순환에 맞춰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살았습니다. 부활이 生老病死의 판도를 바꿔 버립니다. 생각할 수 없었던 사이클을 제시합니다.

‘생로병사가 끝이 아니다. 하나가 더 있다. 그게 부활이다. 부활이 있으니, 인생관을 바꿔라. 역사관을 바꿔라. 삶을 바꿔라.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지 말고, 부활을 생각하면서 살아라. 부활이 있으니 부활하신 예수의 십자가 아래 모여라’.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교회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부활을 희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부활이 없었다면 존재 할 수 없는 공동체고, 여기에 우리가 모일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부활의 망상을 가지고 모였다면 가장 불쌍한 사람들, 가장 허망한 사람들이 될 뿐입니다.

생로병사, 죽음이 마지막이면 어느 종교에 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의 기질에 맞게 신앙생활하면 됩니다. 하지만 죽음 다음에 부활이 있다면, 죽음의 판도를 바꾸신 게임 체인저인 부활하신 그리스도 아래 와야 합니다. 이처럼 부활은 교회의 존재 이유고, 자신감이고, 자존심입니다. 그 부활의 자부심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앙인이고, 신앙의 삶입니다.

엡 4장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엡 4:25-26, 31-32)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산다면 좋을 게 없습니다. 적당히 속이고, 큰 소리도 치고, 마귀에 틈도 줘야 재미있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본성대로 살지 말고 선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뭡니까? 인생의 사이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사람들에게는 生老病死가 끝이 아니라 生老病死活이 끝입니다. 죽음 다음에 활이 있습니다. 쉽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할 사람이 밥먹듯이 거짓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거짓을 버리고, 죄를 짓지 않고, 친절하고, 용서하고. 유치하고 어리석은 게 아니고 현명하고, 자부심 넘치는 삶입니다.

부활주일 아침에 다시 한번 마음에 새깁시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고 부활이 마지막이다. 부활을 마음에 담고 사는 것은 신앙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거룩한 자존심’입니다. 이 자존심 뺏기지 마십시다. 부활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당당함과 견딤을 줍니다.

4.
죽음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지금은 죽음이 흔한 시대입니다. 육체의 죽음도 흔하고, 죽음같은 삶에 빠질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사업으로, 배신으로, 사기로, 사고로, 병으로, 실패와 실수로.. 수 많은 죽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복된 인생을 죽음처럼 보내야 하는 것인가? 할 때, 우리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죽었다, 끝났다, 망했다. 쉽게 말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고, 살아내고, 부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굳게서서 흔들리지 말고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다운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부활을 막는 ‘무덤의 돌’은 언제나 있습니다. 무거움을 가지고 무덤 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좌절, 두려움, 냉소, 원망, 상처, 불안, 응어리, 절망, 낙심, 우울..다 부활을 막는 무덤의 돌들입니다. 이 돌을 옮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고 부활이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죽음에 지지 마십시다. 죽지 마십시다. 죽어도 사십시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흔들리지 말라.
너희 수고는 헛되지 않다.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입니다. 듣고 살아나십시다.

이 음성을 마음에 새기면서 성찬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신 것은 죽으라고 주신게 아닙니다.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살과 피로, 영으로 내가 함께 한다. 죽지말라, 살아라. 우리를 위한 주님의 피요, 나를 위한 주님의 몸입니다.

오늘 아침 주시는 이 성찬이 우리에게 있는 죽음의 그림자, 죽음의 영을 제압하는 생명과 기쁨으로 가득한 성찬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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