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읽는 요한일서 묵상 4: 사귐, 누림, 기쁨(요일1:1~4)
1.
요한일서 서문의 나오는 세 단어, 사귐, 누림, 기쁨은 볼 때마다 좋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간절한 단어입니다. 이토록 기분 좋은 단어를 90 노인의 글에서 발견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 세 단어는 신앙인들이 품고 있어야 하는 중심 마음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세 단어는 다 연결되 있습니다. 하나가 깨지면 나머지도 다 깨집니다. 굳이 세 단어의 중심을 말하라고 하면 사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귐에서 누림이 나오고, 기쁨이 나옵니다.
‘사귐’은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입니다.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 거기서 나오는 교제와 나눔, 연합이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의 원형, 출발은 하나님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친밀한 교제 속에 있었고, 이 모습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에덴은 코이노니아의 성지입니다. 에덴의 에덴됨은 사귐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친밀했고, 인간과 인간이 친밀했습니다. 동물과 인간, 세상과 인간이 해함도, 상함도 없은 사귐 속에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인간의 오만으로 코이노니아가 깨집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부부 사이, 인간 사이도 멀어집니다. 에덴의 동쪽은 ‘사귐’이 깨진 힘과 폭력이 지배하는 단절된 세상이 됐습니다.
성경의 역사와 메시지는 이렇게 잃어버린 코이노니아를 되찾는데 있습니다. 구원은 사귐을 되찾는게 구원입니다. 구원이 있는 곳에는 ‘코이노니아’(사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고, 타자가 있습니다.
2.
1장에 보면 두 차원의 사귐이 나옵니다. 1장에 4번의 코이노니아가 나오는데, 그 중에 두 번, 3절상, 7절의 나오는 사귐은 사람끼리의 수평적 차원의 사귐이고, 3절하, 6절의 사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차원, 영적 차원의 사귐입니다. 둘은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엮여 있습니다. 우선 순위를 따지만 수직적 차원의 사귐이 수평적 차원의 사귐을 끌고 갑니다.
요한 사도가 이 세 단어를 마음에 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듣고 보고 만진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때문입니다. 제가 아직 요한일서 서문에서 밝히지 않은 한 단어가 있습니다. ‘생명’ 입니다. 요한일서 서문에서 가장 중심되는 단어입니다. ‘생명’이 사귐과 누림과 기쁨을 만듭니다.
기뻐하기 힘들고, 누리기 힘들고, 쓸쓸 할 수 밖에 없는 노인 요한이 충만한 기쁨과 누림과 사귐을 가지고 요한 문헌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예수의 생명’ 때문이었습니다.
1절과 2절에 보면 요한은 예수님을 ‘생명’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봤기에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말했습니까? 생명은 무엇입니까? 생명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움직이고, 힘이 있습니다. 죽은 고기 보십시오. 아무리 크고 멋있어도 뒤집힌채로 떠내려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작아도 물살을 거슬러서 올라갑니다. 이게 생명입니다.
요한이 주님에게서 이런 생명을 본 것입니다. 요한에게 주님은 살아 계신 분입니다. 살아서도 살아있고, 죽어서도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요한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11:25)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정신 나간 자의 과장이 아니라 진실이고 참이라는 것을 그분의 말씀과 삶과 고난과 부활을 눈 앞에서 목격자로 겪어내면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흥분되는 목소리로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한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이다’ (2절)
마태 7:7에서 주님이 말씀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준다’. 이 말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구하면 무엇을 준다는 것일까요? 구하는 거면 무엇이든 준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주님이 원하는 것을 구하면 준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자신이 필요한 것으로 이용할 때가 많지만 주님이 구하면 주신다고 하는 것은 제가 볼 때는 ‘생명’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고 싶어하시고, 생명을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도 생명 때문에 주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육체의 생명이 아닌 영적인 생명입니다. 죽음도, 악도, 삶의 어둠도 무너지지 못하게 하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주고 싶어하십니다. 이 생명을 구하고, 경험하고, 누리는 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생명없는 신앙을 신앙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은 생명이 있을때만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고, 어떤 삶의 순간에서도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힘을 줍니다.
3.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 경험’이 아니라 ‘생명 경험’입니다. 생명 경험은 예수 경험이고, 하나님 경험입니다. 신앙은 답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는 답을 누리고, 경험할 때 신앙이 됩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어도 내 밖에 있는 ‘어떤 대상’으로만 존재한다면 예수님은 경험될 수 없습니다. 바울이 갈2:20에서 고백한 것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뚜렷한 의식과 경험을 가지고, 내 존재 깊은 곳에서 나와 교제하며,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를 고치고, 나의 기쁨이 되고, 나의 힘이 되는 것으로 경험될 때 예수님이 답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경험되지 않은 예수님은 상상에 의한 예수 밖에 될 수 없습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고, 누리게 하고, 기쁘게 하는 ‘생명의 경험’이 필요합니다.생명되신 주님과의 사귐이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영(롬8:9)으로 충만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고후3:18)과 그리스도의 마음(고전12:27)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빛(엡5:8)과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16)로 살게됩니다.
4.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되는 단어 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감수’(甘受) 입니다. 쓰지만 뱉지 않고 쓴 것을 달게 받는 것입니다. 체념하지 않고 감수하여 받아들일 때 새로운 현실이 만들어 집니다. 감수가 힘들지만 감수 안에 희망이 숨어 있고, 감수가 생명을 만들어 냅니다. 감사한 것은 예수의 생명을 가진 이들에게는 ‘감수’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이 감수가 사귐과 누림과 기쁨을 만들어 냅니다.
창조부터 종말까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건강도, 재산도, 명예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입니다. 창조의 에덴에도, 종말의 새하늘과 새 땅에도 ‘생명 나무’가 있습니다. 에덴과 새 에덴의 중간에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의 소원대로 생명과 사귐과 누림과 기쁨을 포기하지 마시고, 이 땅의 삶을 살아내는 여러분의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