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있는 요한일서 묵상 3: 기쁨 2 (요일1:1~4)
기쁨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고, 신앙인들의 삶에 있어야 하는 성품이고, 삶의 태도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기뻐하고 싶지만 기뻐할 수 없는 힘든 현실, 이 현실을 대처할 때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기쁨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세 단어를 보겠습니다. 체념, 회개, 인내입니다. 체념은 버리고, 회개는 해야 하며, 인내를 가질 때 기쁨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1. 체념의 포기
諦念은 더는 기대할 게 없어서 포기하고 단념하는 것입니다. 체념할 때가 있지만 체념은 아프고, 슬픈 현실입니다. 인생은 저항과 체념 사이에 있는데 체념은 저항의 포기입니다 저항이 죽으면 죽습니다. 하여 체념하면 많은 게 죽게 됩니다. 기쁨, 사랑, 연민, 믿음, 감사가 죽습니다. 체념은 기쁨의 저승사자입니다.
기뻐하기 위해서는 체념의 포기, 포기의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고후1:8~9절 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체념할 뻔 했던 순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사형 선고를 받을줄 알았다는 것은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체념의 상태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체념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체념을 포기합니다. 체념의 포기는 자신의 포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자신입니까? 체념의 극치는 자만이기 때문에 자만한 자신를 포기한 것입니다. 체념의 순간을 보십시오. 체념할 때 사람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판단합니다. 할 수 있다고 말해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도 안 듣습니다. 다 끝났고, 더 이상 길이 없고, 나아질 수 없다고 합니다. 자만일 수 있고, 교만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체념의 순간에 자기를 내려 놓습니다. 자만의 포기입니다. 자신은 의지할 대상도 아니고, 체념의 순간을 이길만한 실력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자만 대신 하나님을 보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체념에서 믿음으로, 자신에서 하나님으로 전환시킵니다.
체념은 불행입니다. 자신만 불행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들기에 버리는 게 답입니다. 체념을 포기해 보십시오. 많은 것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기쁨도 당연히 살아납니다.
2. 회개의 실천.
회개는 체념에 묶여서 자만했던 자신에 대한 회개입니다. ‘힘들지만 체념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인정하는 방향전환입니다. 회개가 기쁨의 회복을 견인(牽引)해 줍니다.
회개시에 해야 할 중요한 확인이 있습니다. 기쁨의 개념과 기쁨의 시각을 새롭게 보고, 바꾸는 것입니다. 기쁨의 개념이 바꾸지 않으면 다시 체념의 단계로 넘어 갈 수 있기에 기쁨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기쁨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언제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기뻐하십니까? 우리의 기쁨은 대단히 자기 중심적이고, 세상적입니다. 기쁨의 조건과 이유가 자신의 만족을 넘어가지 못할 때가 태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아닙니다. 요한 사도에게서 본 것처럼, 요한의 상황은 세상적인 조건으로 보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노인이 뭐가 기쁘겠습니까? 노인은 기뻐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요한은 기뻐했고, 충만한 기쁨을 전하고 싶어합니다.
요한은 어디서 이 기쁨을 배웠습니까?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자신이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경험했던 생명의 주님, 부활하신 주님과 사귀고 누리면서 배웠습니다. 기쁨의 조건과 기쁨의 차원이 같지 않습니다.
요15:9-11 입니다. 요한복음도 요한일서 처럼 노년의 요한 사도가 기록한 문서인데, 요한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주님의 말씀 중에서 기쁨에 관한 말씀 하나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제자들이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면서 기쁨의 조건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기쁨으로 기뻐하셨던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의 기쁨이 그들 안에 있어 그들도 기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조건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과 함께하는데서 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주셨습니다. 요한은 이 말씀을 젊은 시절에 들었지만 그 때는 이 말씀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산전수전, 인생의 단맛 쓴맛을 겪으면서 이게 맞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노년에 기록으로 남겼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원한다면 이 조건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기쁨은 어디에서 옵니까? 기쁨은 무엇입니까?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하신 일을 하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성품과 뜻에 동참하며 살 때 기쁨이 오고, 거기서 나오는 뜨거운 감정의 폭발, 이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예뻐지고, 섬기면 뿌듯해 지고..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기뻐했는지, 어떤 조건에서 기뻐했는지 말씀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행5:41.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모욕과 기쁨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함께 나옵니다. 기뻐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하지만 기뻐했다고 합니다.
고후8:2.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이런 역설이 어디있습니까? 환난과 기쁨, 극심한 가난과 넉넉한 베품. 이 장면이 이해가 되십니까?
고후 6:10.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기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만사 형통할 때, 만족 할 때만 생기는 감성, 감정이 아닙니다. 보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은 주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걸어 갈때, 세상의 어떤 것을 의존하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나오는 능력이고, 힘이고, 사랑이고, 믿음이고, 소망입니다. 이 기쁨을 우리가 확보해야 합니다.
3. 인내의 확보.
세 번째 기쁨의 조건은 인내입니다. 인내는 회개와 시각의 변화가 요구하는 요청입니다. 근심 가운데서 기뻐하려면 인내 없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난이 인생의 ‘常數’라면, 인내는 常數인 고난을 넘게하는 성품의 常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내라는 성품으로 고난을 넘어설 때 기쁨이 다가 옵니다. 기쁨은 인내가 만들어 내는 결과물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 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 들이리라’(시126:5).
인내가 낯설어지고 있지만 인내는 버릴 수 없는 매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인내 속에 성취가 숨어있습니다. 관계를 유지하는 힘도 인내에 있습니다. 나를 바꾸고, 너를 바꾸고, 가정을 바꾸고 싶으면 인내해야 합니다. 체념을 이기게 하는 의지도 인내에서 나옵니다. 인생의 봄은 인내하는 자가 맞는 기쁨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인내 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인생의 답은 인내하는 자가 찾는 법입니다.
결론은 기쁨은 ‘인내하는 자가 누릴 수 있다’입니다. 체념하고, 냉소하고, 폭발하면 기쁨은 점점 멀어집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여러분의 실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으로 이겨내는 놀라운 하늘의 은혜, 오늘 아침 여러분들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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