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5. 성탄절: 왜 오셨습니까? 주님(마1:23). 양은익 목사.

 

왜 오셨습니까? 주님(마1:23)

1.
격세지감, 많이 달라진 성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흥청망청한 성탄절을 보면서 걱정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소리 소문 없이 퍼지고 있는 바이러스 앞에 큰 소리 치지 못하고 숨 죽이고 있는 형국이 되 버렸습니다.

2년 남짓한 사이에 5백5십만의 사람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한국도 백신 사망자 빼고 5천명 정도의 분들이 희생당하셨습니다. 백신 다 맞고 나면 마스크 벗고 성탄절과 새해를 맞이할 줄 알았는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보이지도 않는 녀석이 아직은 우리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 ‘혹시나’ 하는 두려움과 떨림이 있습니다.

얼마전에 코로나로 사망한 분들의 장례 장면을 사진으로 본적이 있습니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벽제 화장터에서 만나 맨 바닥에 무릎 꿇고 절하는 힘든 사진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해 줄 수 없는 무력함만 가득합니다. 2021년도 성탄절의 풍경입니다. 올해는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면 안될 것 같아서 그렇게 했습니다. 내년에는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분명한 것은 힘들고, 슬픈 성탄절일수록 더 잘 보내야 합니다. 잘 보내는 방법은 성탄의 뜻을 성찰하고, 되새겨서, 성탄의 소망을 분명히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 단어 입니다. 슬픔-성찰-소망입니다. 힘든 성탄절을 보내는 신앙인들이 품어야 할 세 마디입니다. 가운데 있는 성찰이 슬픔을 이기게 하고 소망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성찰은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성탄의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오늘 말씀 제목입니다.

주님 왜 오셨습니까? 피조물인 우리가 감히 물을 수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묻고 답을 얻어야 하는 귀한 물음입니다. 이 물음 속에 슬픔을 이기고 소망할 수 있게하는 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2.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어떤 우리입니까? 두려움과 떨림, 슬픔, 의심과 불신에 끊임없이 노출되있는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전능자’가 ‘무력한 자’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초라하고 약한 이성으로는 담을 수 없는 초월자의 사건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징조(徵兆, 일이 생길 기미)라 하고 사인(Sign, 표식)이라 합니다. 어떤 사인입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사인입니다. 이러한 사인을 보면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사인으로 오셨습니다.보라.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사인은 두 사람이 듣습니다. 한 사람은 오늘 본문의 요셉이고, 다른 한 사람은 유대왕 아하스입니다. 아하스는 요셉보다 700년 전에 먼저 이 소리를 듣습니다.

두 사람 다 두려움과 불신 속에 있던 사람입니다. 요셉은 약혼녀의 임신 때문에 두려웠고, 아하스 왕은 밀려오는 침략자들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특별히 아하스 왕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징조를 구해보라는 권유를 받지만(사7:11)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보다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해서 싸워 보겠다는 것입니다. 떠내려 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는 손을 내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분노한 이사야 선지자에게서 나온 예언이 임마누엘 예언입니다. 사. 7:14 당신이 징조를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보여 주실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

믿음 없는 아하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버리고 강대국의 힘을 의지한다고 하는데 아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는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니 착각하지 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어라’. 이 징조의 예언이 700년 후에 두려워하고 있던 요셉에게 다시 전해진 것입니다.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아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징조다. 받아 들여라. 감사하게도 요셉은 이 징조를 받아 들이고 임마누엘의 예수를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3.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인(Sign)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말로만 함께 하신다 말씀하지 않고, 형체없는 개념으로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로 함께 하심을 보여 주기 위해 ‘몸’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의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몸으로 오신 예수께서 어느 정도로 우리와 ‘함께’하셨습니까? 엡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함께, 함께, 함께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함께 하는 것 아닙니까? 함께하심. 주님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주님은 함께 하시면서 죄에서 구원해 주셨고(마1:21),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롬8:1,2) 시키셨으며, 영생을 선물로(요3:16)로 주셨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을 넘어서는 평안을(요14:27) ‘함께 하심’으로 당신의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힘들고 슬픈 성탄절 아침, 우리는 이 성탄의 소식(구원.해방.영생.평안)을 다시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조와 사인을 거부하는 세상 한 복판에서, 매순간 두려움과 떨림으로 마음 졸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가 할 일은 이 임마누엘의 사건, 임마누엘의 영성을 마음에 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선언해 주셨고, 고백하셨습니다. ‘내가 언제나 너희들과 함께 하겠다’. 틈만나면 멀리하는 우리들에게 그럼에도 ’함께하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 하나님의 고백에 여러분의 ‘응답’도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임마누엘을 포기하지 마십시다. 임마누엘이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명분과 구호로만 남아있지 않고 신앙을 체험하는 자로, 살아있는 신앙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고백 속에는 생각을 정립하고, 바른 판단과 행동을 결정하게 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볼 수 있는 시력이 ‘임마누엘 시력’(Immanuel Sight)입니다. 이 시력이 좋아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사인과 징조, 흐름에만 민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못읽게 되면 낭패(狼狽) 볼 수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임마누엘의 징조가 더 크게 선명하게 보여서 슬픔과 힘듬을 이겨내는 소망 가득한 성탄의 아침이 되기를 축복하고 축원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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