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오신 주님과 오실 주님 사이에서(마25:14~30)
1.
1996년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Maria Wislawa Anna Szyborska, 1923~2012)의 시 한 구절입니다.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 이미 너무도 많이 일어났다.
또한 기대했던 수많은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내내 말했듯이,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부분)
누군가 시인에게 묻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일어나지 말하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일어나기를 기대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묻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도 물어보고 싶었다면서 이 질문을 반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순진한 질문같지만 가장 절박한 질문이라는 말로 시를 마칩니다. 우리도 물어봐야 할 질문입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읽은 비유가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2.
오늘 읽은 비유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달란트를 맡깁니다(14절).그리고 돌아와 맡긴 것에 대해서 결산합니다(19절). ‘결산’이라는 두렵고, 부담되는 단어가 주인과 종 사이에 있게 됩니다. 없으면 좋겠지만 다시 오실 주님은 ‘결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가지 비유(열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깨어 있어’, ‘결산에 대비하라’. 롬14: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이 순간을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결산)이 있습니다’. 주인과 종사이, 주님과 나 사이에는 ‘결산’의 순간이 있습니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결산이라했는데 무엇에 대한 결산입니까? 맡긴 것에 대한 결산입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달란트를 사람마다 가진 재능이나 실력으로 읽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런 독법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달란트가 재능이나 실력이라면 사람마다 차이가 나게 되고 그런 차별에는 기쁨과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달란트가 의미하는 것은 각자에게 준 생명이고, 삶이며, 사명이고 소명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것, 가족, 교회, 시간, 삶, 자연, 사회 모두가 우리가 받은 달란트입니다. 받은 달란트는 같지 않지만 맡겨 주셨기에, 이 맡김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것이 주신 분에 대한 최고의 예의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19절 이하에 보면 떠났던 주인이 돌아와 결산을 합니다. 분위기가 둘로 확연히 갈립니다. 한 쪽은 밝고, 한쪽은 어둡니다. 한쪽은 신나고 한쪽은 우울합니다. 한쪽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 평가가 너무 좋지만, 다른 한쪽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평가가 심각합니다. 갈라진 이유가 뭡니까? 맡긴 것에 대한 ‘응답의 차이’입니다. 다섯 달란트와 둘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와 은혜에 부응합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의 마음에 응답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것(=응답의 모습)으로 결산하시는 것입니다. 결산의 기준은 성공도 아니고, 이윤도 아닙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달란트,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생명에 최선을 다했는가?, 주신 은혜와 사랑에 얼마나 잘 ‘응답’했는가? 이것으로 결산하십니다.
3.
‘응답’이라는 말을 썻습니다. 소중한 단어입니다. 신앙을 만드는 단어고, 관계를 만드는 단어입니다. 응답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서고, 응답을 통해 관계는 깊어지고 발전합니다. 응답이 없게 되면 형식적인 만남 밖에 되지 못합니다. 옆에서 ‘춥지’라고 말할 때 ‘응 춥네’라고 대답해 주는 것과 아무 소리 안하고 입 꾹 다물고 있는 것은 같을 수 없습니다. 문자를 보냈는데 받아 놓고도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예의가 없는 것입니다. 무응답은 상처를 줍니다. 상처가 있다면 상처에 응답하고 아픔이 있으면 아픔에 반응할 때 삶은 성숙하고 발전합니다.
신앙은 응답을 통해 깊어집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겠다’(렘33:3) 하나님도 부르면 응답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응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응답하십니까? 말씀이 들릴 때 어느 정도 반응하십니까? 응답과 반응이 깊어지는 만큼 삶은 가치있게 되고, 신앙은 풍성해집니다.
오늘 비유에는 중요한 응답 두가지가 있습니다. 충성과 게으르지 않는 것입니다. 선물로 주신 삶에 충성으로, 게으르지 않는 것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1) 적은 것이라도 정성을 다해 응답하라.
21절, 23절 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긴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한 말입니다. 맡긴 것에 ‘충성’(=정성)을 다해 응답했기에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정성’은 힘을 다하는 것, 심혈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대충하지 않고 건성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같을 수 없습니다. 삶의 결론, 삶의 결산이 좋으려면 ‘정성’이 빠지면 안됩니다. 기도 한번을 해도 정성을 다해 하고, 예배 한번 드려도 정성것 드리고, 사람을 한번 만나도 마음을 다하고. 보는 사람도 좋고, 보시는 하나님도 기쁘실 것입니다.
선물로 받은 삶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 결산의 날, 어떤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하겠습니까? 대충 살지 말고 ‘정성’을 다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고, 반응입니다.
(2) 게으르지 않음으로 응답하라.
두번째 응답은 게으르지 않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 살려면 게으르면 안됩니다. 26절에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단호합니다. 악과 게으름을 동격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게으른 것은 맡긴 것을 아무 것도 안하고 묻어 두었기 때문에 게으른 것도 있지만 이 사람이 가진 정신적이고, 영적인 게으름 때문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질책을 듣게 된 것입니다.
24절에 이 사람의 게으름이 나옵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24,25) 달란트를 땅에 묻게 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주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있습니다. ‘굳은 사람이다’. 굳다니요! 베풀어 준게 얼만데요. ‘심지 않은데서 거둔다’ 마치 일확천금을 거두는 사람으로 매도합니다. ‘두렵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는 없는 생각인데, 이 사람은 ‘내가 다 안다’ 그러면서 자신의 판단과 선입견에 완전히 묶여 있습니다. 이런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면 큰일이니 땅에 묻어 버린 것입니다. 게으름을 말할 때 몸이 게으른 것만 게으른 것으로 보면 안됩니다. 생각이 게으른 것도 게으른 것입니다. 생각이 게으른 것은 생각이 닫힌 것입니다. 생각이 닫히면 사람은 별 수 없습니다.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서 더 이상의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가능성, 새로운 기회, 성숙의 기회 다 막히게 됩니다. 그래서 게으름이 악과 동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게으름은 그냥 두면 ‘괴물’이 됩니다.
삶을 복되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폐쇄성이 만들어내는 편견과 오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하라’(롬12:2)분별하여 늘 새로워지는 게 응답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애3:23. 새번역)
이런 귀한 고백이 아침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판단을 넘어선 하나님의 마음과 판단으로 활짝 열리면, 이해와 배려와 눈물과 사랑으로 가득한 삶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처음 시로 돌아갑니다.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 이미 너무도 많이 일어났다.
또한 기대했던 수많은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의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 ‘심혈을 기울여서’ 생명과 삶을 주신 은혜와 사랑에 ‘응답’하고, ‘반응’하면서 다시 오실 영광의 주님을 힘차게 기다리고 기대하면서 살아가십시다. 결산의 순간에 주님께서 보고 싶어하시는 모습입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