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2. 주일 설교: 깨어있기,오신 주님과 오실 주님 사이에서(마25:1~13). 양은익 목사.

 

깨어 있기, 오신 주님과 오실 주님 사이에서(마25:1~13)

1.
세상은 ‘기다릴 수 없는 사회’, ‘기다리기를 싫어하는 사회’가 됐지만 우리는 여전히 ‘기다림’을 말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기다림’을 ‘사막’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우리가 현재 있는 곳과 우리가 있고 싶어하는 곳 사이에 있는 메마른 사막이다’. 기다리는 게 힘들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모습들입니다 ‘목을 빼고 기다리고, 마음을 다잡아 기다리고, 숨죽여 기다리고, 몸부림치며 기다리고, 멍하니 기다린다. 애달프게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고, 지치다 못해 끝까지 못 기다리고, 기다리다 쓰러지고, 밤을 새워 기다리고 결국 정신이 나가도록 기다린다’. 듣기만 해도 힘듭니다. 이렇게 기다려 본 적이 있으십니까?

기다리다 지치는 것 보다 기다리지 않는게 속 편할 수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으면 서운함도 없고, 실망도 없고, 힘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할 일도 없게 됩니다. 하지만 기다림은 없을 수 없습니다. 기다려야 할 일은 생깁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교회와 신앙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다림은 개인적인 기다림이 아닌 신앙적인 기다림입니다.

많은 것을 기다리고, 기대할 수 있지만 신앙인의 기다림 속에 꼭 있어야 하는 기다림은 ‘주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요한 계시록이 어떻게 끝납니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오셨던 주님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기대함으로 끝나게 됩니다.재림이라는 단어가 지금은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쑥 들어가 있지만, 신앙인의 정체성은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2.
오늘 잘 알려진 주님의 비유 읽었는데, 이 비유가 강하게 도전하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데, 오신 주님과 오실 주님 사이에서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세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열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24장과 연결된 비유들입니다. 24장에서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시고, 25장에서 다시 오실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비유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결혼식이 있는데 신랑이 무슨 이유인지 늦게 오게 됩니다. 신랑과 같이 가야 하는 신부 들러리가 10명이 있었는데 기다리다 잠들게 됩니다. 그러다 갑자기 신랑이 오게 됩니다. 부리나케 일어나서 가려고 하는데 5명의 들러리가 ‘잠깐만’ 하게 됩니다. 보니까 기름이 아슬아슬했던 것입니다. 준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름 준비한 5명에게 빌려달라고 하지만 나눠 썼다가는 전부 갈 수 없기에 거절당합니다.결국, 기름 사러 가게 되는데 그 사이에 신랑이 오고, 신랑은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던 5명의 들러리들만 데리고 잔치에 가게 됩니다. 기름 사러 간 친구들이 부리나케 뒤쫓아 오지만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들려오는 대답은 냉정합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25:13). 냉정하고 분명하게 말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비유가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올텐데 언제 올지 모르니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 처럼 잘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3.
‘깨있으라’, 깨어나라’는 말, 오늘 아침 마음에 담으십시오. 상투적인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신앙의 삶과 일상의 삶을 살아 갈 때, ‘꼭 가져야 하는 모습’입니다. ‘깨있으라’는 것은 ‘각성한 자’로, 제대로 ‘보는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깨있어야 슬기로운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도 보십시오. 다섯 처녀가 미련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등만 준비하고, 등을 밝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치밀하지 못했습니다. 기름 없으면 등은 있으나 마나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깨있지 못하면, 제대로 보지 못하면 ‘등’만 보게 됩니다. ‘등’이 비유하는 것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삶의 외적인 차원입니다. 외모, 재산, 직업, 직위 같은 것들이 ‘등’입니다. 우리를 좌지우지 하는 것들이고, 이것만 있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살아가는 이상 각자의 ‘등’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등을 준비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하지만 그 ‘등’이 자신은 아닙니다. 그리고 ‘등’만으로는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등을 밝힐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등과 기름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도전하는 것은 등 좋은거 가졌다고 안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등 나쁘다고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등을 밝혀줄 기름을 보라는 것입니다. 기름이 있는가?

기름은 ‘등’을 밝히는 힘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내면을 밝히는 힘, 삶을 밝게 만들고 힘차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이 내면의 힘이 있으면, 등이 좋든, 나쁘든 등에 불을 부쳐 빛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름이 필요하고, 이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기름을 성령으로 해석합니다. 성령은 질그릇같은 나에게 와서 나를 빛나게 만드는 기름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다. 성령은 깨닫게 하는 진리의 영으로 오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고, 슬기롭게 만들어 주는 인도자(Guider) 이십니다. ‘깨있기’ 위해서 먼저 와야 하는 게 ‘깨달음’인데, 성령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4.
‘깨달음’은 열림입니다. 막혀있던 이성, 감성, 영성이 열려서 보지 못했던 것들, 보이지 않던 것들, 알기를 거부했던 것들, 느끼기를 거부했던 것들이 보이고, 알게 되는 것. 이게 ‘깨달음’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를 ‘깨나게’ 하고, 기름을 준비하는 자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깨달아야 할 게 많지만 가장 중심되는 ‘깨달음’이 오늘 비유에 나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림이 깊을수록 ‘깨있게’ 되고, ‘깨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인생은 미완성일 수 밖에 없습니다. 노래 가사처럼, 인생은 쓰다 마는 편지고, 부르다 멎는 노래고, 그리다 마는 그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곱게 쓰고, 아름답게 부르고, 잘 그려도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살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인생의 완성, 생명의 완성은 생명을 만드신 분이 완성시켜 주실 때 완성이 됩니다. 왜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까? 다시 오실때 완성되지 못하고 멈춰 있던 우리의 고단하고, 힘들었던 생명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다시 오사(살전4:16).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을 입고 새하늘과 새 땅에서 참 안식과 자유와 평안을 누릴 때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다시 오심으로 완성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다라고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들도 그 영광스러운 날을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그리스도인들은 이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대림절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마음에 품는 계절입니다. 다시한번 뜨겁게 ‘깨어나’ 힘을 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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