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5. 주일 설교: 인생 수정2, 교만(시16:18, 시131). 양은익 목사.

 

인생 수정2: 교만(잠16:18, 시131)

1.
지난 주부터 잠언의 지혜자가 말하고 있는 7가지 치명적인 죄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하나같이 수정하고, 고쳐야 하는 것들입니다.

오늘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교만’을 제대로 보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교만’이라는 단어,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잘난 체하는 태도로 겸손하지 않고 건방진 것’으로 풀고 있는데, 어떤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아픈 단어고, 속상한 단어입니다. 없으면 좋겠지만, 없는 데가 없고, 안해 본 사람도 없고, 이걸로 상처 받아 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현실입니다.

‘내가 너보다 낫다’라는 우월감에서 시작하게 되는데, 이런 작은 우월감이 만들어 내는 파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7가지 치명적인 죄를 말씀드렸지만, 그 7가지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죄, 뿌리 죄로 보는 게 교만입니다. 우리는 수 많은 것으로, 틈만 나면 교만합니다. 가진 것으로 교만하고 지식으로 교만하고, 영적으로도 교만합니다. 내가 너보다는 낫지! 너보다는 잘해.

문제는 잘났다는 마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별을 만들어 내고, 그 차별로 고통을 주는 게 교만의 무서움이고, 죄성입니다. 차별의 밑바닥에는 ‘내가 너보다는 낫다, 우리가 너희들보다는 우월하다’는 ‘교만’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인종 차별부터 시작해서, 민족 차별, 빈부 차별, 능력 차별, 젠더의 차별. 진영의 차별. 전부 똑 같습니다. 우리가 옳고, 우월하다는 교만이 있습니다.

그 교만함으로 담을 쌓고, 무시하고, 조롱하고, 편을 나누고, 공격하고, 모함하고, 싸웁니다. 더나아가 하나님에게도 교만합니다. 교만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으로만 살아가는 교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무신론이 최고의 교만입니다. 교만은 죄의 뿌리가 될 만합니다. 교만은 사랑을 막고, 진실을 막고, 자유를 막고, 믿음을 막고, 귀를 막고, 상대방의 말을 막습니다. 수정해야 하는 고약한 죄성입니다.

2.
렘9:23에 보면 경고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최고의 목록들입니다. 똑똑하고, 힘있고, 돈 많으면 얼마나 자랑하고 싶습니까? 교만할만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자랑도, 교만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 4:7입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다 받은 건데, 받은 것 같고 생색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동의 할 수 있다면 쉽게 교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33:16에서도 말합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너희들의 능력과 무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말고 당신들의 똑똑함과 힘과 돈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을 의지하라. 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일관됩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싫어 하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니 교만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시각입니다. 약4:6.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잠16:5.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 오늘 본문 잠16:18입니다.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 성경은 확신을 가지고 교만의 결과가 나쁘다고 말합니다. 인정하고, 고쳐 나가야 합니다.

3.
아담의 죄성을 물려 받은 우리들이 교만하지 않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만의 반대가 겸손일텐데, 교만과 겸손 중에서 어떤게 더 자연스럽습니까? 교만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교만은 연습하지 않아도 수시로 튀어나옵니다. 교만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단한 자기 점검과 영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하여,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다짐이 필요합니다 교만하지 않겠다는 다짐 하나하고, 겸손한 삶을 살아내겠다는 다짐입니다.

(1) 교만하지 않겠다.
시편 131편 보십시오. 교만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시인이 하고 있습니다. 1절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않으며 내 눈 높은 데를 보지 않사옵니다. 나 거창한 길을 좇지 아니하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꾸지도 않사옵니다’.

네 개의 부정문으로 되 있습니다. ‘않겠다’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고, 높은 데 보지 않고, 거창한 길 좇지 않고, 주제넘는 놀라운 일을 꿈꾸지 않고. ‘교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씩이나 반복해서 교만하지 않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만하다 큰 일을 겪었는지, 교만한 사람을 보다 그 교만함에 질렸는지 모르겠지만 교만이 만들어 내는 아픔을 보면서 ‘마음 차분히 가라 앉혀’(2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다가 알게 된 것입니다.

교만으로는, 자기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젓먹고 어미 품에서 평온하게 잠든 아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자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희망을 걸지 말고-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희망을 걸자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여호와께 두어라’. 아멘. 얼마나 귀한 고백이고, 선포입니까! 희망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돈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마음 차분히 가라 앉혀서 이 사실을 늘 묵상하고 발견해야 합니다. 희망을 하나님께 둘 때 교만이 사라지고 겸손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2) 겸손하겠다.
어거스틴이 한 말이 있습니다. ‘교만은 천사를 마귀로 만들고, 겸손은 사람을 천사로 만든다’. 교만과 겸손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교만이 만들어낸 상처와 싸움과 독선과 분열을 겸손이 고치고 회복시킵니다. 교만은 차갑지만, 겸손은 넉넉하고, 따뜻합니다. 겸손에서는 사랑이 나오고, 함께 하는 힘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의 고백 기억하십니까? 주님으로 인해 자기 제자들을 뺏기고, 자신의 인기가 하락 하는데도 뭐라 말합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겸손한자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인정이고, 고백입니다. 이런 넉넉한 겸손이 곳곳에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겸손이 가능합니다. 십자가를 알고, 은혜를 알기에 겸손이 가능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값없이, 잘한 것 없이 온전히 선물로,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교만할 수 없고, 교만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사명 갖고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도 겸손하고, 하나님에게도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으로 교만한 세상을 고쳐 나가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 되면 좋겠습니다. ‘겸손하겠다’는 다짐, 하면서 살아 가십시다. 겸손으로 사랑을 만들고, 상처난 세상을 회복시키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축복하고 축원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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