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12. 주일 설교. 인생 수정 3: 분노(잠15:1). 양은익 목사.

 

인생 수정3: 분노(잠15:1)

1.
기도서에 나오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는 건강함이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 삶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 삶은 건강하고, 복되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는 우리가 보고 있는 7가지 인생 수정의 모습도 분명히 들어 갈 것입니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해서는 안되는 것들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목록인 ‘분노’를 보겠습니다. 분노에 대한 성경과 잠언의 지혜는 분명합니다. 분노하지 말라입니다. 성경은 분노라는 현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분노를 통해 불의에 맞서고, 공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분노를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분노에 대한 잠언의 지혜와 성경의 증언은 일관됩니다. 분노는 위험하니 조심하라. 할 수 있는 한 하지마라, 하더라도 더디하라. 분노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이다. 분을 그쳐라. 노를 버려라. 버리지 않으면 악이 나온다.

그림으로 분노의 모습을 보려고 합니다. 그림을 보면서 분노의 특성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노는 화가 쌓여서 나오는 큰 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 이 장면이 잘 나오고 있습니다. 속에서부터 불만의 감정들이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대부분의 불만은 자기 맘에 안 맞는 것들일텐데 이 감정들이 누군가를 향해 나오게 되는 것은 분노입니다. 안에서부글부글 끓다 안 맞는 것에 대해서, 안 맞는 사람에 대해서 폭발하게 됩니다. 화도 내고, 욕도합니다. 소리도 칩니다.

도끼든 여자 보이십니까? 분노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앞뒤 안 가리고 때려부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환호합니다. 그러다 ‘분노의 불’이 붙어서 사방으로 거칠게, 순식간에 퍼져 나갑니다. 내 분노가 너의 분노가 되고, 너의 분노는 너의, 너의 분노가 되서 분노가 넘쳐 나게 됩니다. 분노의 안 좋은 것만 보여 드린 것 같아 죄송하지만 그럼에도 이게 분노의 실상입니다. 

2.
세상이 사나워졌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하면 분노가 많아졌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이 사납습니까? 넉넉하고, 부드럽습니까? 날선 글들, 날선 말들, 날선 얼굴이 많으면 세상은 사나워진 것입니다. 속상하지만 우리는 심한 앵그리 사회(Angry Society)에 살고 있습니다.

분노를 유발시켜서 돈을 벌고, 추종자를 모으고, 분노로 편을 나누고, 분노를 무기로 싸우고 있습니다. 분노가 없으면 큰일 납니다. 분노가 클수록 이길 수 있습니다. 분노로 자기를 방어합니다. 분노하는 게 정상이고, 분노하지 않는 게 바보입니다. 화를 너무 참아서 화병이라는 고유한 병을 가진 민족이 우리인데 이제는 참으면 안되는, 참지 못하는 민족이 되버렸습니다. 분노하고, 큰소리쳐야 살 수 있는 곳이 되버렸습니다.

잘못 본 것이면 좋겠지만 사실입니다. 분노로 잃어 버린 것이 너무나 많고, 지금도 그 피해가 엄청난데도 분노가 주는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버리지 못하고 분노에 휩싸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분노하지 말라는 언사(言辭)가 얼마나 고리타분하고, 현실적이지 않게 여겨지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간디의 말이 기억납니다. ‘오늘날 세상의 눈에는 핏발이 서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침착하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똑바로 마주 보아야 합니다’(1942.8.8). 복잡한 인도의 정세로 서로가 적대시 하던 때에 한 말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말입니까? 사람들이 눈에 핏발 세우고, 사납게 살아가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맑게, 분노하지 말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분노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야 하는 교회와 신앙인들의 모습으로 보고 싶습니다. 세상이 분노하고, 사람들이 분노한다고해서 같이 핏대를 세우는 것은 아무리 봐도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다.

간디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눈에는 눈을 고집하면 온 세상의 눈이 멀게 됩니다’. 분노의 문제로 치환하면 사람들이 분노한다고 같이 분노하면 세상은 분노로 가득차게 되고, 분노로 어두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사 C.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이라고 하는 여성 정치 철학자가 있습니다. 하버드에서 오랫동안 가르쳤고, 지금도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그분의 묵직한 책 중에 ‘분노와 용서_적개심, 아량, 정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묻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해야 한다’는 말이 언제나 옳은가? 우리는 옳다고 생각하고, 지금 분노하고 있지만 이 분은 아니라는 것을 조목조목 밝혀주고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분노를 유발하는 영역을 셋으로 나눕니다. 가족들과 자녀들, 일상 생활에서 가까이 하는 사람들, 정치가 분노를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누스바움은 모든 경우에 분노가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분노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분노는 생각하는 만큼 유용하지도, 현명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분노해야 하는 분노도 똑같다고 합니다. 하여, 분노보다 ‘비-분노’가 유용하고, 세상과 삶을 바꿀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3.
성경의 결론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다르게, 우리의 분노는 지혜롭지도,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분노하지 않는 게 좋고, 분노하지 않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시편37:7-8절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이 모습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잠15:1의 권고대로 우리의 반응은 Soft해야(유순)합니다. 부드러울 때 분노가 가라 앉게 됩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것처럼, 분노를 이기는 것은 온유함입니다. 온유한 자가 강자입니다.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your gentleness made me great) 시18:35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온유함이 있을 때 위대해 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온유하셨습니까? 갈보리 십자가, 그 거친 폭력 앞에서 온유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대담한 온유고, 위대한 온유입니다. 이 온유를 우리가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온유가 있을 때 거친 파도 같은 우리의 마음에 안식이 찾아옵니다. 안식이 있을 때 샬롬의 마음이 생기고, 아량과 용서의 마음이 들어오게 됩니다. 타자를 향해 마음을 여는 ‘진정한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하지 말자는 것은 분노할 일을 덮자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를 이겨내자는 것입니다. 분노를 이길 수 있는 길이 더 강한 분노라는 고정 관념이 깨지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세상에서 분노를 이기는 길은 온유고, 화목이고, 함께 함이라는 것, 기억하십시다.

성 프란시스(St. Francis)의 기도가 간절해 지는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읽고 마칠텐데 가을의 길목에 서 있는 우리의 기도, 우리의 모습이 되면 좋겠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Make me a channel of your peace)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온유와 평화로 분노를 이기는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축복하고 축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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