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29. 주일 설교: 인생 수정1, 시기와 질투(잠14:30). 양은익 목사

 

인생 수정 1: 시기와 질투(잠14:30)

1
지혜자가 잠언의 말씀을 통해서 바라는 것은 삶의 수정과 변화입니다.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 잡는게 수정일진대 수정이 필요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정을 통해서 삶은 발전되고, 성숙해 집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수정을 통해서 바꿀 수 있기에 후회할 일이 많을수록 ‘수정’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수정해야 하는가? 사소한 것 보다는,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 위주로 수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감사하게도 교회 전통에서 7가지 치명적인 죄, 죽음에 이르는 죄(7 Deadly Sins)라는 항목으로 제시해 준 게 있습니다. 우리가 수정해야 할 중요한 모습들입니다. 제목이 무시무시한 것을 보면 대단히 심각하게 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가지 모습은 스크린 보십시오. 7가지 나옵니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입니다. 잠언 기자도 중요하게 본 모습들입니다. 이번 기회에 보면서 삶을 성찰하고, 수정하는 기회로 삼고 싶습니다.

2.
첫 번째, ‘인생 수정’의 모습은 ‘시기와 질투’입니다. 삶에서 떠나지 않고 붙어있는 모습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그토록 치명적인 죄인가? 반문할 수 있지만 그렇다는게 신앙의 시각이고, 경험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만들어내는 삶의 풍경과 사건들을 보면 ‘고치지’ 않으면 안되는 마음이고, 감정이라는 것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잠언 기자가 경고하는 것 보십시오.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새번역). 사소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러기에 질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기는 삶의 방향을 바꾸고, 힘든 인생으로 몰고 갑니다. 질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작은 부러움에서 시작하지만, 그 부러움이 시기가 되고, 시기가 질투가 되 버립니다.

성경에 나오는 질투의 사건들 보십시오. 가인과 아벨, 사라와 하갈, 요셉과 그 형들, 사울과 다윗, 요나와 니느웨 사람들. 동일한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없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속상함에서 시작하지만 급기야 사람을 죽이고(가인), 광야로 내 몰고(사라), 팔아 넘기고(요셉 형들), 나라는 뒷전이고 죽일려고 따라 다니고(사울), 소명까지 버리고 도망갑니다.(요나) 질투가 만들어내는 아픈 풍경들입니다.

질투는 질투하는 자, 당하는 자 모두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삶을 바꿔 버립니다. 사울이 다윗에 대해 조금만 넉넉했더라도 그의 말년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질투의 사건이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에 질투가 많다는 것이고, 질투가 주는 위험이 작지 않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시기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시기는 언제나 우리 옆에서 포진하고 있다가 기회만 되면 훅하고 들어옵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 직업불문, 장소불문입니다. 질투가 들어오면 별걸 다 갖고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뼈를 썩게 만듭니다.

초대 교회 때 사막에 기둥을 세워놓고 수행하던 기둥 성자(Pillar Saints)들이 있었습니다. 대단한 영성가들이고, 신앙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기둥이 점점 높아졌다고 합니다. 왜 높아졌는지 아십니까? 서로 질투하다가 높아졌습니다. 한 사람의 기둥이 올라가면 그것보다 더 높게 올리고. 그러다가 기둥이 부러지고, 떨어져서 추락사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욥기 5:2. 시기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약3:16. 시기와 다툼이 있게 되면 혼란과 악한 일로 인해서 무너지게 됩니다. 하여, 성경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갈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질투하지 말라.

3.
질투는 사절하는 게 좋습니다. 그럼에도 질투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깊어지고 있고, 지독해지고 있습니다. ‘질투사회’, ‘시기사회’라는 말을 할 정도로 우리 안에 깊게 들어와 있습니다.

질투가 왜 더 심해졌을까요? 질투가 심해진 배경으로 꼽고 있는게 치열한 경쟁입니다. 경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는 법, 승자는 질투의 대상이 되고, 패자는 질투하는 자가 됩니다. 인생을 경쟁으로 보는 한 질투는 깊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평등 사회가 되면서 질투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나와 다를게 없는 당신들이 잘 되는 것에 대한 수긍이 쉽지 않게 되버렸습니다. 질투가 일어나고, 그 질투가 공평과 공정을 요구합니다. 이런 공평과 공정이 증오와 진영으로 갈라 놓습니다. 서로를 공격하고, 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배려, 이해, 사랑, 옳고 그름은 사라지고 ‘기분’만 지배하는 사회가 되가고 있습니다. 질투하는 대상과 진영이 실패하면 기분이 좋고, 대상이 잘되면 기분이 나쁘고. 얼마나 유치하고 단순한 세계관입니까?

4.
더 깊어지지 않도록 고치고, 수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살고, 사회도 살고, 모두가 살 수 있습니다. 소설가 김홍신 씨가 인상 깊게 한 말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배고픔은 해결했지만, 배아픔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언제 이 배아픔이 해결 되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 서서 질투로 가득한 문화를 수정시켜 나가야 합니다.

질투할 만한 일들이 일어나겠지만 지지말고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방법은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과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삶으로 수정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질투와 시기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부르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어떤 영광, 으시댐, 우월감, 자랑이 아닙니다. 남의 삶에 집중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나의 소명과 은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소명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늘의 상급으로 갚아 주십니다. 모든 것을 다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의 은사가 필요하고, 서로의 도움이 필요할 뿐입니다.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기억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영광과 칭찬만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일이 사람들이 보기에 하찮아도 최고의 소명이고, 삶이 되는 것입니다.

질투를 막고 싶다면 감사하십시다. 질투를 막는 최고의 방어막은 감사입니다. 감사가 넘치면 질투는 꼬리를 감춥니다. 질투의 마음이 올라 올 때 시험해 보십시오. 범사에 감사하고,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구원의 은혜를 주심에 감사하고, 때마다 일깨워 주심에 감사하고, 위기 가운데서도 함께 해 주심에 감사하고, 뜻 대로 되지 않는 일을 겪으면서 인생을 알게 해 주심에 감사하고. 질투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질투와 시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지만, 질투에 지지 말고 감사와 은혜를 아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명예로움, 놓치지 마십시다. 시기와 질투를 이겨내는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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