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28. 주일 설교: 두 번의 외침(Two shoutings)(막11:8~11,15:6~15). 양은익 목사.

 

두 번의 외침(Two shoutings)(막11:8-11, 15:6-15)

1.
고난 주간의 무대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 사역의 종착지입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한 예수 운동은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서 마치게 되는데, 그 시작이 바로 우리가 오늘 지키는 종려 주일에서 시작됩니다. 종려 주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수님의 고난은 축제와 흥분으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들끊기 시작합니다. 흥분과 긴장이 그렇게 넓지 않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됩니다. 흥분하는 이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무리들, 백성들이고, 긴장하는 이들은 예수를 반대하고 견제하는 이들입니다.

사람은 흥분하면 소리를 지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두 번의 커다란 외침(Shouting)이 있고, 이 외침이 예수님의 상황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 외침은 단순한 함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에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두 번의 외침입니다.

누가 외치고 있습니까? 무리라고 불리어지는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유대의 백성들이 외침의 주체입니다. 오늘 읽은 두 군데 본문이 사람들의 외침과 함성이 나오는 본문입니다. 두 번의 외침 가운데서 첫번째 외침과 두번째 외침은 너무나 다릅니다. 외치는 사람들은 같은데 외침의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2.
첫번째 외침은 환호하고, 열광하는 외침입니다. 예수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나귀타고 들어 오시는 예수를 보면서 레드 카펫을 깔고 환영합니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길에 까는 사람도 있고, 커다란 종려 나무 가지를 꺽어서 길에 까는 사람도 있습니다. 왕을 맞이하는 것 같은 흥분으로 격하게 환영합니다.

9절에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나옵니다. Shouting의 내용이 뭡니까? ‘호산나. 복되시도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새번역)

환영의 까닭은 한마디로 하면 ‘호산나’ 입니다. ‘우리를 구원해달라’. 얼마나 절박한 외침이고, 위험한 외침이며, 정치적인 외침입니까? 로마에 더 이상 눌려살지 말고, 독립하여 다윗이 이루었던 강대한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데몬스트레이션입니다. 유월절을 맞이해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 로마 당국자들과 유대 지도자들을 긴장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외침입니다.

두 번째 큰 외침(Shouting)이 나흘 뒤에 예루살렘을 흔듭니다. 이번에도 무리들이 외칩니다. 호산나하면서 예수를 환호하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13,14절)외칩니다. 一口二言. 호산나 하면서 외치던 사람들이 단 4일만에 변절합니다.

마가는 11절에서 대제사장들이 그들을 선동하고 사주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선동을 했는지는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유언비어를 퍼트리게 했는지, 매수를 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결박 당해 끌려와 있는 예수를 보면서, 자신들이 상상했던 어떤 허상이 깨지자 돌변했던 것입니다. ‘나올게 없다’ ‘기대할 게 없다’ ‘속은 것 같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할 수 있지만 이럴 수 있는 게 사람입니다. 삶의 무게가 무겁고, 힘들면 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게 인생인데, 누가 장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우셨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과 호산나의 외침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지만 그 환영에 들뜨지 않고 예루살렘이 한 눈에 보이는 곳에 가셔서 앞으로 일어난 일들은 아시는 듯 뜨거운 눈물을 흘리십니다.

눅19:41.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공동번역) 자신을 위해 울지 않고 예루살렘과 그 곳의 사람들, 지금은 환영하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십자가에서 죽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 사람들만을 위해서 우시는거 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시고, 당신을 알아 보지 못하는 모든 이들, 자신이 원하는 기대와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변할 준비가 되있는 약하고 슬픈 인생을 위해서 울고 계십니다.

3.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는 너무도 푸릅니다’.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기념관 마당에 있는 기념비에 적혀있는 글입니다. 기념비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데,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쓰여진 이 碑文을 보면서 감동하는 문장입니다.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삶은 이토록 슬픈데 바다를 보니까 너무도 푸른 겁니다. 그래서 더 애잔하고 슬픕니다. 인간이 슬픈 이유는 뭔가요?

[침묵]에 보면 세바스찬 로드리고라는 포르투갈 신부가 나옵니다. 17세기에 기독교 박해 시기에 일본으로 선교를 오게 되는데 밀고에 의해 잡히게 됩니다. 배교를 요구받게 되고, 배교를 하지 않으면 일본인 교인들이 고문 당하다가 죽게 될 것이라는 협박과 회유를 당하게 됩니다.

배교의 사인으로 예수님의 성화를 밟으라고 합니다. 엄청난 상황 앞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갈등하게 됩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성화를 밟아 피흘리며 고문 당하는 교인들을 살리는 게 사랑인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순교를 당하는 게 사랑인지 고뇌하게 됩니다. 그 때 성화 속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한다’. 결국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고 배교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겉으로는 배교하여 일본의 종교로 전향하지만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이며, 자신의 진심은 하나님만이 알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부가 자신의 배교를 합리화하는 것인지는 확인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작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부의 약함과 아픔을 비난하지 않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를 슬퍼하고 연민하고 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와 무리들 공히 힘있는 자들의 힘에 조정당하는 약한 이들입니다. 생각하고, 믿는 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들만 그렇겠습니까? 로드리고 신부가 있고, 무리가 있고 이제는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강한가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습니다.

기대한 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우리도 약해지고, 어쩌면 십자가에 못 박으라, 겉으로는 소리치지 못하지만 삶은 이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채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야 할 이들이 예수를 떠나니 슬픈 것이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삶의 현실이 아프고,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모습에 더 아픈 것입니다.

우리도 호산나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두 외침 사이에 있습니다. 어떤쪽으로 가야 합니까? 호산나 쪽으로 가서 호산나, 나를 구원해 주소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를 외치십시다. 아무리 봐도 우리에게는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구원할 힘이 없다는 것은 간편한 책임 전가가 아니고, 슬퍼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직면한데서 온 절실한 고백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래 전게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면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가 그린 메시아는 고통 당하는 자와 함께 하는 깊은 연민을 가진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슬픔을 아는 그리스도입니다. 슬픔을 알기에 슬픈자의 눈물을 닦으시고, 슬픈자의 약함과 상처와 모순을 이해하며 보살펴 주실 수 있습니다.

본 회퍼가 옥중에서 쓴 것처럼, 고통 당하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하여, 우리는 매순간 호산나를 외쳐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호산나를 외칠 때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를 온전히 따르는 자가 되어 부활의 삶으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예수를 버리는 삶에서 벗어나 호산나를 깊고, 크게 외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외침 속에 부활의 환한 아침이 밝아 올 것입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