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억지로’의 신앙적 용법(히11:4)
1. ‘억지로’의 용법
오늘은 ‘억지로’라는 부정어를 보면서, ‘억지로’가 만들어내는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억지로’라는 말을 볼 때 어떤 기억이 떠오른다면 대부분은 힘들고, 안좋은 기억일 것입니다. 자존심 상한 기억도 있을 것이고, 기분 나쁜 기억도 있을 것입니다.
안희경 작가(인터뷰어)가 쓴 글 한 꼭지 읽어 드리겠습니다. ‘약자는 자주 미소 짓는다. 서열이 낮을수록 당신에게 나는 위험한 존재가 아닙니다라는 신호를 보내며 혹시나 모를 거부감을 막아보려 한다. 인간이란 종은 귀여움에 약하기에, 약자는 아기처럼 순하게, 강자보다 더 많은 시간을 빗질하듯 자신의 태도를 손질한다’
‘약자는 자주 미소 짓는다’. 이게 맞다면 참 서글픈 일입니다. 서글푼 이유는 웃고 싶지 않지만 웃어야 하는 억지 웃음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일은 웃음만이 아니라 차고 넘치게 있습니다. 억지춘향 처럼, 하기 싫지만 할 수 없이, 눌려서, 강제로 해야만 하는 상황이기에, 할 수 없어서 하지만 하고나면 남는 것은 찜찜함과 초라함입니다.
’억지로’를 부정어로 쓰고 있지만, 억지로가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억지로 해야 할도 많이 있습니다. 공부가 저절로 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힘든 훈련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힘들지만 필요하니까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2. ‘억지로’의 신앙적 용법: 기꺼이. 흔쾌히. 저절로.
그럼에도 더 좋은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강제로’ 하는 것 보다는 ‘기꺼이’, ‘흔쾌히’, ‘마음 다해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는 게 좋고, 더 많아야 합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불행하고, 기꺼이, 흔쾌히, 열렬하게 하는 일이 많을수록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기꺼움과 흔쾌함입니다. 좋은 것을 주어도 기꺼이가 없이 억지로하게 되면 언젠가는 문제가 생깁니다. 억지로에는 후휴증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억지로 하게 되면 언젠가는 탈이 납니다. 신앙의 어법에는 ‘하라’가 많습니다. 기도하라. 말씀보라. 봉사하라. 필요하지만 사실은 강요의 어법입니다. 독려하고 권하는 것은 맞지만 항상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까지 ‘하라’는 말만 하고, 들어야 합니까? 평생 이런식으로 신앙생활 할 수는 없습니다.
강요해서라도 되면 좋겠지만 억지로 하는 기도, 억지로 읽는 성경, 억지로 드리는 예배, 억지로 하는 교제, 봉사에는 메리트가 없습니다.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꺼이’, ‘흔쾌히’입니다. 무엇을 ‘하는 것’ 보다, ‘되는 것’ 쪽으로 가야 신앙도, 삶도 풀리게 됩니다.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읽는 것’보다 ‘읽혀지는’ 말씀, ‘하는 사랑’이 아니라 ‘되는 사랑’이 될 때, 억지로가 주지 못하는 뿌듯함이 생겨서 뭘 해도 기쁘고, 신나고, 좋습니다. 되기 위해서는 함이 필요하지만, 결론은 되는 쪽으로 가야 됩니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오늘 본문에 이 부분이 잘 나와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두 형제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부라 농산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라 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제물이었고, 예배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았고, 가인의 제물은 거부하십니다. 거부한 이유가 창세기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힌트를 줍니다. 오늘 본문 11:4절에 힌트가 나옵니다. 공동번역이 의도를 잘 살려서 번역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올바른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벨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 믿음의 모습으로 인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에게서 보여지는 믿음으로 인해 ‘기꺼이’ ‘흔쾌히’ 그의 제물과 그의 예배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 제물은 제사를 드리는 자와 등가 관계, 제물은 제사 드리는 사람과 같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그의 제물이 잘못되서 받지 않은게 아니라 가인 자신, 가인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태도, 그의 삶의 자세와 방식을 받을 수 없었기에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향하여 흔쾌함이 있는 삶과, 믿음이 있었고, 그런 기꺼이를 보고 하나님도 기꺼이 그의 제사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에게는 흔쾌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는 ‘억지로’, ‘마지못해’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나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강요’가 아니라 ‘자발’, ‘타율’이 아니라 ‘자율’을 원하십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가인을 거부하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 보십시오. 가인이 핏대내도 찾아오고, 아벨을 죽인 후에도 찾아 오세요.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쉽게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인 같아도 하나님은 찾으시고, 찾아오세요. 이 사실을 아십니까? 관건은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아서 틀린 것 있으면 고치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한테 마지못함과 억지로가 많으면, 억지로에서 기꺼이로 용법을 바꿔야 됩니다. 저는 이게 억지로의 짐과 부담감에 눌려서 지쳐가고 있는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의 최대 과제다 싶습니다.
한번 살펴 보십시오. 억지로가 많은지, 흔쾌히가 많은지!! 예전에는 그래도 기꺼이가 꽤 있었는데 억지로가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많아졌다면 왜 많아졌는지…
4. 기꺼이의 삶을 향해.
저를 심란하게 만들었던 그림 한장 보겠습니다. Ferdinand Hodler라는 화가가 1892년에 그린, The Disillusioned One 환멸에 빠진 사람이라는 그림입니다.
제목처럼 검은 사제복을 입은 이가 환멸에 겨워 축 쳐져 있습니다. 어떤 힘도, 생동감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손 꼭잡고 기도하는 것 같지만 기도가 되지 않아 망연자실한채 한 쪽 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제를 보고 그린 것 같은데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누구 보다도 환희와 기쁨에 넘쳐야 할 사람인데, 이렇게 되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까? 사연을 찾아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누구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렇게 될 수 있고, 여러분들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꿈에도 싫지만 사람은 꿈과 의미를 잃으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나이 많은 노인의 쓸쓸함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의미를 잃어 버리게 되면 하는 모든 게 억지로가 되고, 그 억지로, 억지로가 쌓이다보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없이 자주 쓰는 말 하나있습니다. ‘사는 게 뭐 별거 있어?’ 사는 게 별거 있습니까? 별거 없습니까? ‘별것’이 있다면 의미가 있고, ‘별것’ 이 없다면 의미가 없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별것’은 말 그대로 ‘별난 것’입니다. 특별하고 가치가 있는 것, 어둔 밤 하늘에서도 별처럼 반짝이는 것. 이런게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눈이 반짝 반짝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 별난 것을 이루기 위해 누가 말하지 않아도 흔쾌히, 기꺼이 움직입니다.
별것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겁니다. 감사한 것은 신앙인들에게는 대단히 특별한 ‘별것’이 있고, 선물처럼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 믿음의 삶,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 별난 것이고, 특별한 것입니다.
이 ‘별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특별한 것인지를 더 깊고 깊게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과 삶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고, 억지로가 아닌, 뭘 해도 흔쾌히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기반이 만들어 집니다.
힘 빠지는 매일의 일상에서 ‘되어진다’는 것, 흔쾌하게 산다는 것, 쉬어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시작해야 합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시작하면 보물같은 의미가 보이고, 그 의미가 ‘억지로’라고.하는 무거운 부정의 부담감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뭘해도 ‘기꺼이’와 ‘흔쾌함’으로 가득한 시원시원한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이 되면 좋겠습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말로 맺겠습니다. ‘그대는 나날이 나아가십시오. 나 또한 나날이 나아가겠습니다’. 나날이 나아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우리 모두 ‘기꺼이’ 나날이 나아가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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