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14. 주일 예배: ‘하필이면’의 신앙적 용법(빌4:11~13). 양은익 목사. 온라인 예배

 

‘하필이면’의 신앙적 용법(4:11-13)

1. ‘하필이면’의 용법
오늘 부정어는 ‘하필이면’입니다. 파괴력이 상당히 큰 말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 힘들어 질 때 따지듯이 튀어 나옵니다.

내일이 제대하는 날인데 하필이면 제대 전 날 전쟁이 납니다. 배가 침몰해서 무인도에 떠밀려 갔는데, 하필이면 살아 남은 사람이 자기와 자기 아내입니다. 도둑이 숨었는데 하필이면 포도청이고, 곰을 잡았는데 하필이면 웅담이 없는 곰입니다.

이런 하필이면은 남의 일이라 들어 줄만 합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힘든 하필이 많이 있습니다. 뒤에 장애를 가진 아이 엄마가 쓴 글을 소개해 드릴텐데 이 엄마가 내뱉는 ‘하필이면’은 절규에 가깝습니다. ‘하필이면 왜 우리 아이입니까? 하필이면 왜 식민지 조선입니까? 하필이면 왜 아무 것도 없는 집안입니까?’ 아십니까? 알면 좀 가르쳐 주십시오.

답답해서 쓰기는 하지만 알 수 없습니다. 하필이면은 운명론적이고, 폭력적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거칠게 밀고 들어와서 몰아 부칩니다. 항의해도 소용없고, 쓰면 쓸수록 속상하고, 힘듭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긴장하는 말 중에 하나가 ‘하필이면’ 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 와서 정색을 하면서 ‘왜 하필이면 접니까, 하필이면 우리 가정입니까?’ 물으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힘들고,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피성이 있기 때문에 긴장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느끼실 겁니다. ‘하필이면’이라는 말 속에 얼마나 깊고, 많은 불안이 있고, 실망이 있으며, 좌절과 슬픔, 분노와 항의가 배여 있는지. 하나님과 사람과 삶에 대한 원망과 거부가 이 한마디 속에 가득 차있습니다. ‘하필이면’이라는 마음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면 막아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하필이면’은 절대 답이 될 수 없다. 줄여야 하고, 바꿔야 하고, 강하게 대처해야 한다. 하필이면 처럼, 폭력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사건과 운명은 강하고, 터프하게 대처하는 단단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좋은 일이 나쁜 일 되고, 나쁜 일이 좋은 되고, 어떻게 변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 할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알면 좋겠지만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도 요행도 내 뜻대로 못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어나는 일에 대처하고, 대항해서 ‘하필이면’에 매몰 당하지 않고, 현명하게 극복해 나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2. ‘하필이면’의 신앙적 용법
이번에 미국 대통령이 된 바이든에게 젊은 시절 아버지가 주었다는 두컷 짜리 만화입니다. 바이든이 젊었을 때 교통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게 됩니다. ‘하필이면’의 상황입니다. ‘하필이면’ 자기 아내고, 자기 딸입니까? 원망 가득한 시간에 아버지가 말해주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벼락치는 하늘을 향해서 ‘Why Me?’ 왜 하필 나입니까? 항변하는 이에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Why not?’ 왜 너면 안되는데? 야박한 것 같지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한 마디입니다.

‘하필이면’을 어떻게 극복하면 되겠습니까? 하필이면’으로는 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이같은 상황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쿨하고, 터프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인정이고, 불행의 인정입니다. 이 인정에서 극복이 시작 됩니다. ‘그래 나 한테도 일어날 수 있지!’ 이게 시작입니다. 용법을 바꾸기 시작해야 합니다.

3.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지향하라(빌4:11-13)
(1) 바울은 지금 옥중에서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정의 시간이고, 하필이면의 시간입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대조되는 단어군이 나옵니다. 밝음의 단어와 어둠의 단어가 함께 나옵니다. 어둠의 단어는 궁핍, 비천, 배고픔이고, 밝음의 단어는 풍부, 자족함, 배부름입니다.

바울은 어둠의 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어둠과 하필만 보지 않고, 밝음도 함께 보면서 자족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어둠만 봐도 무너지고, 밝음만 봐도 무너집니다. 어둠과 밝음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어둠도 인정하고, 밝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영성에는 밝음의 영성과 어둠의 영성이 있습니다. 둘 중에 한 가지 영성만 추구하면 온전한 영성, 온전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축복, 기쁨, 성공, 만사 형통, 해결이 좋지만 이것만으로는 어둠이 존재하는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어둠에는 어둠에 필요한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밝음의 영성만 가지면 ‘하필이면, 어차피, 아니야’ 같은 부정어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고, 못견뎌 합니다.우리는 어둠을 싫어하지만 성경은 어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45:7 보십시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빛만 아니라 어둠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어둠이 하나님 안에 있다면 어둠은 나를 죽이는 시간이 아니라 살리는 시간입니다. 14세기 고전 [무지의 구름]에 나오는 말을 저는 신뢰합니다. ‘이 땅에 사는 한 그분을 체험하거나 볼 수 있는 곳은 이 구름과 어둠 밖에는 없다’

이 말이 이해되면 좋겠습니다. 밝음과 축복이 주지 못하는 것이 어둠 속에는 있습니다. 어둠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밝음이 아니라 어둠속에서, 실패와 눈물 속에서 ‘인생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한없이 무력하고 작습니다. 두렵고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4:13. 내게 능력주시는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그 능력으로 우리 앞에 있는 고난의 산봉우리들을 한고개 두고개 넘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앞에서 말씀드렸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 엄마의 글, 마지막 부분 읽어 보겠습니다. 수 많은 밤을 ‘하필이면 왜’로 밤을 지새우면서 답을 찾고 싶었던 엄마입니다. 약을 잘못 먹어서, 태교를 잘못해서, 음식을 잘못 먹어서, 임신한 것을 후회하다가 벌 받아서 이렇게 된 것인가?. 그러다가 내린 결론입니다.

‘내 아이가 장애인이라는 것은 이미 깊숙히 받아들였으며 나름대로 왜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다. ‘왜’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 원인이 무엇이었든, 내 아이는 이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나는 그저 이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것만 고민하면 된다. 내 잘못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설령 아이의 장애가 나로 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계산하고 의도한 결과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책망하기를 멈추고 그저 함께 잘 살면된다. 나는 이 아이와 함께 어떻게 잘, 아주 잘 살것인지만 고민하면 된다. 이게 내 결론이다’. 이 지점이 우리가 출발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3)
하필이면 대신에 쓸 용법으로 ‘지향’(指向)이라는 말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지향은 목적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 목적한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지향입니다. 이 指向이 ‘하필이면’의 상황 속에서 신앙인들이 해야 할 최고의 모습입니다.

지향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4:13절. ‘내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 지향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지향 할 때 하나님이 되십니다. 지향이 없으면 하나님은 있지만, 나에게는 없습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지향하고, 꿀벌들이 꿀을 지향하는 것 처럼 의식과 마음을 집중해서 하나님을 지향 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다가 오게 됩니다.

집중할 때 감추어졌던 것들이 나타나고,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하나님을 지향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지향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지향의 대상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향 할 수도 있고, 자신의 불운을 보며 ‘왜’’하필이면’을 지향 할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자신의 몫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지향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지향하면 되돌아 오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다가 오십니다. 필요할 때만 급해서 찾는 모호한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하시는 기적과 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런저런 기적이 많겠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기적이고, 최고의 기적입니다.

원하는 것 이루어지는 것도 기적이겠지만, 실패하고 넘어진 순간에도 능력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왜, 하필, 재수 없게’로 일관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한발한발 걸어가는 그 귀한 모습이 사실은 기적입니다. 지향하는 자가 누리는 복된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의 모습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필이면의 공격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이겨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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