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8. 주일 설교: ‘없음과 있음’의 신앙적 용법(빌4:11-13). 양은익 목사.

 


말씀:’없음과 있음’의 신앙적 용법(빌4:11-13)

1. 없음과 있음의 용법
본문 한번 더 보겠습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새번역)

볼수록 대단한 고백이고, 부러운 고백입니다. 우리도 동일한 고백을 하십시다. 11절에 나오는 형편은 ‘있음과 없음’, 두 가지입니다. ‘있음과 없음’은 오늘 보려고 하려는 부정어입니다. 喜怒哀樂이 배어있는 묵직한 단어입니다. ‘없음’에는 노(노여움)와 애(슬픔)가 배어있고, ‘있음’에는 희(기쁨)와 락(즐거움)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사이에 끼어 살고 있습니다. 이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없으면 힘들고, 있으면 즐겁고.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없음과 있음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무산자 유산자하면서 겪었던 잔혹한 역사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두 사이에서 울고, 웃고, 뺏기고 뺏고, 주눅들고 과시하고.

‘있음’보다는 ‘없음’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더 짙고 거칩니다. 없음이 주는 가치가 있지만, 없음이 주는 힘든 현실에 밀려 말하기 조차 힘듭니다. ‘없음’ 앞에서는 누구나 다 상처를 받습니다. 하여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달리는 말에 채찍하듯 자신을 몰아 부칩니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고 달려가게 만듭니다.

2. ‘없음과 있음’의 신앙적 용법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삶을 흔들어 대는 힘이 있습니다. 있음으로 무너지는 사람도 많고, 없음으로 무너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없을 때는 어떻게하고,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낡고 보잘것 없는 신발을 불평하고 있었는데 발이 없는 사람을 보았다’. 불평하는 순간 아차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귀한건 보지 못하고 신발 타령만 하고 있는 자신의 하찮음을 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 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없음과 있음’ 대신 사용할 어법으로 ‘자족’과 ‘만족’을 권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있음과 없음’이 우리의 만족을 강하게 막고 있습니다.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

지금 만족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단어를 갖다 놓으셔도 됩니다. 집, 수입, 자녀, 건강, 신앙, 교회, 사랑, 하나님.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만족하십니까? 지난 달 수입에 만족하십니까? 교회의 환경과 상황에 만족하십니까? 남편의 사랑에 만족하십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만족하십니까?

만족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없음이 막고, 무엇인가 있어도 더 큰 욕심이 만족을 막고 있습니다. 만족 할게 없는데 무슨 수로 만족 할 수 있습니까?

꼭 기억해 두십시오. 바울의 말하는 자족의 의미, 자족의 질감은 우리가 말하는 자족과는 다른 자족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어떤 상태나 환경에 대한 만족이 아닙니다. 집에 만족한다. 건강에 만족한다. 이런 만족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하나님에 대한 만족입니다. 자신을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서 오는 든든함과 신뢰.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이끄시고 있다는 깊은 확신에서 오는 자족.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어떤 물질적인 소유에서 오는 만족과는 비교 할 수 없는 든든함을 ‘자족’이라는 말로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능력 주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있고, 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기에 모든 것, 없어도 무너지지 않고 만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이것을 배웠을 겁니다. 바울은 ‘있는집 자식’으로 출발합니다. 승승장구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바울은 없음의 사람, 약함의 사람으로 하강합니다. 매도 수없이 맞고, 죽을뻔 한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셀수도 없는 위험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자지도 못하고, 굻고 춥고 헐벗었습니다.(고후11:23-27)

하지만 다 견뎌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신기한 겁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구나. 함께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주권이 있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이끄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 그게 바로 자족입니다. 이같은 자족이 우리가 소원해야하는 자족이고, 우리가 배워야 하는 자족입니다.

그래서 없음과 있음 사이는 ‘믿음’으로 연결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없음과 있음 사이를 자신의 소원이나, 기대나, 성취로 연결하면 둘 사이의 연결은 대단히 위태위태합니다. 기대한 대로 되면 만족하겠지만, 기대한 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과 불만만이 가득차게 되서 있던 믿음마저 사라지게 됩니다.

신자의 만족의 조건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이끄심에 대한 신뢰가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 할 수 있게 하는 일체의 비결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자족이라는 놀라운 성품과 태도를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단단한 믿음 가지십시오.

3. 없음과 있음의 해석에 대하여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해석을 잘해야 합니다. 시인들의 선생으로 알려진 이성복 시인이 ‘있음과 없음’에 대해서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있음과 없음의 순서를 바꾸기만 해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있음’이 아니라 ‘없음’을 출발로 삼으라고 합니다.  ‘없음’에서 나와 ‘있음’의 상태로 머물다가 다시 ‘없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게 인생이고, 삶입니다.

‘없음’이 저와 여러분들의 원상태입니다. 없음이 정상이고, 있음은 선물입니다. 내 존재도 선물이고, 내 삶도 선물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정말 큰 복이고, 은혜입니다.

문정희 시인의 ‘상처를 가진 사람-오에 겐자부로에게’라는 시입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의 존경받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입니다. 이 사람에게 히카리(빛)라는 정신장애 아들이 있습니다.

다리미질하는 아내 곁에서 아직도
잉크로 원고를 쓰는 사람
세계는 그를 노벨상 작가라 부르지만
그를 키운 건 문학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아들이었음을
어젯밤 뉴스에서 보았다

뒤뚱거리는 불구 아들의 손을 잡고
험준한 산봉우리 오르는 동안
장애 아들을 이끄는 아버지의
그 통렬한 힘으로 자신은
저절로 산봉우리에 올라 있었다

없음에 물러서지 않는 아버지의 힘과 인내를 볼 수 있습니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오에 겐자부로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상처를 가진 사람이고, 시인은 그 모든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그 없음이, 당신의 고통이 당신을 키울 수 있다고.

세상은 에덴의 동산 이후 낙원이 아닙니다. 뺏고 뺏기는 삶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없는 자의 눈물과 상처, 억울함으로 가득차 있고, 있는 자의 자랑과 과시, 강압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만족하기 힘든 세상이고, 삶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없음과 있음의 신앙적인 용법, 바울이 답을 줬습니다. 있음과 없음이 만들어 내는 상처와 고통 속에서 지금도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더 깊게 응시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이끄심과 주권을 깊게 누려 보십시오. 그 때 우리의 입에서도 ‘만족’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지 않겠습니까?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 할 수 있는 은혜, 선물 우리 교우들 다 받으면 좋겠습니다. 자족함으로 있음고 없음의 힘든 현실 헤쳐 나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