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오라(마11:28~30)
여러분에게 쉼은 어떤 것입니까? 일상에서 피곤한 일을 멈추고, 마음의 부담과 책임감과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 걱정과 근심에서 해방되는 것이 떠오르게 됩니다. 소파에 기대 텔레비전을 보고 낮잠을 자고, 휴가를 얻어 해변이나 숲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것, 직장에서 은퇴하여 여가생활을 즐기는 것 등등 일상에서 다양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모두 필요하고 귀한 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쉽은 육체와 마음의 걱정 근심을 잠시 잊거나 일을 멈추는 한시적인 쉼에서, 근본적이며 지속적인 영원한 쉼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1. 내게로 오라
28절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거운 짐은 삶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형태의 어려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사회는 율법의 짐, 즉 율법준수가 죄를 해결해 가는 중요한 의무가 되어 사람들에게 올무가 되었던 시기로써 해야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되는 엄격한 수많은 규율들에 눌려 있었습니다. 율법에 갇히고, 죄의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괴롭고,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에 한숨 쉬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쉼을 주시겠다고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면 그 모든 짐을 제거해 주시는 걸까요?
그런데 29절에 보면,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있는 짐도 버거운데,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쉼을 얻게 될 것이라구요? 더 큰 짐을 어깨에 얹어 주시는 건가요? 예수님의 멍에는 얼마나 더 힘든 걸까요? 예수님처럼 살게 하기 위해 마치 유대 율법처럼 엄격한 의무 사항과 부담을 더 주시는 건 아닌가요? 어떻게 멍에가 쉼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에게 와서 자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면 쉼을 주시겠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2. 짐
여기서 우리의 짐(멍에)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인생의 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수고와 근심과 고통과 함께 살아갑니다. 죄, 시험, 유혹, 마음의 상처, 깨어진 관계, 가장으로서의 책임, 어머니로서의 수고, 경제적인 어려움, 질병, 죽음의 고통을 몸에 지니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천양희 시인의 ‘견디다’라는 시 한 편 소개해 드립니다.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황새와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못하는 낙타와
일생에 단 한 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백 년에 단 한 번 꽃피우는 용설란과
한 꽃대에 삼천 송이 꽃을 피우다
하루 만에 죽는 호텔펠리니아꽃과
물 속에서 천 일을 견디다 스물다섯 번 허물 벗고
성충이 된 뒤 하루 만에 죽는 하루살이와
울지 않는 흰띠거품벌레에게
나는 말하네
견디는 자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토록 견디는가
이 시를 읽으면, 참 슬픕니다. 발성기관이 없어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황새, 가시나무를 찾아가 가시나무 가시에 찔려 죽어가면서 평생 한 번 운다는 전설의 가시나무새, 백 년을 기다렸다가 고작 한 번 꽃을 피우는 용설란, 천 일 유충으로 있다가 스물 다섯 번 허물 벗고 성충이 되어 하루 만에 죽는 하루살이. 한 번도 울지 못하고 혹은 단 한 번을 위해서 혹은 단 하루를 위해서 백 년을, 천 일을 견디는 새와 꽃과 곤충들의 오랜 견딤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시인은 자신과 사람에게도 묻습니다. 인생이여 너는 얼마나 견디는가?
우리는 인생에 곳곳에 모질게 박혀 있는 그것, 아프게 하는 그 무언가를 저마다 안고 살아갑니다. 언젠가 노래하고 꽃 피우고 날갯짓 하는 날을 고대하며 참고 견디고 기다리며∙∙∙.
그러나 낙심하지 않을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모진 고통 속에 예수님이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오면, 28절과 29절에 주님이 내게로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짐을 없애 주시는 것도 아니고, 짐을 더 지우시는 것도 아닙니다. 환경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어려움이 제거되는 것도 아니지만, 짐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 짐을 통해 자신을 겸손하게 돌아보고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며 성숙하게 해주는 고마운 스승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입니다(29절).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히브리서 4:15), 또 십자가 고난까지 감당하신 분이시기에 사람의 아픔을 가장 깊이 아시고 위로하시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그런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어떤 고통도 그분의 어루만지심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30절). 주님의 멍에와 짐은 주님처럼 되라고 혹독한 훈련이나 무자비한 의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멍에는 대부분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끄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과 한 발 한 발 나란히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죄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으로 이끄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멍에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또 주님을 사랑하는 이가 그 사랑의 계명을 따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함으로 더 순종하기를 애쓰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3. 쉼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쉼은 과연 어떤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성경이 말씀하시는 쉼은 안식을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31-2:3에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1:31-2:3).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다 마치시고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며 심히 ‘좋았더라’,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며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보신 하나님이 참 좋다고 감탄사를 외치며 만족하신 것입니니다. 복되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완성입니다. 모든 것이 채워진 것입니다.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도 가능한 것일까요? 죄가 있는 이 땅에서는 완전한 아름다움과 선함과 만족과 성취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에는 들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맛보고 누릴 수 있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폭풍 같은 고통 속에서도 외로운 광야 한 가운데에서도 동행하시는 주님 안에서 그 안식의 아름다움과 충만함과 만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그 너머의 영원한 안식까지도 소망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인생 여정 중에 누리는 안식과,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나라에서 갖게 될 영원하고 완전한 안식 모두를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주님의 귀한 초청입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이 깊은 쉼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23편은 목자되신 하나님으로 인해 부족함이 없는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깊은 신뢰, 평생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충만을 누리고 영원의 나라에 대한 소망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이 시편은 다윗이 평탄할 때 쓰여진 시가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고난을 많이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쫓기고, 도망 다니고, 숨고, 수많은 전쟁과 반란을 경험하며 고통 중에, 혹은 그 고통을 돌아보며 쓴 시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1절에 삶에 대한 만족을 누리며, 6절의 영원한 안식까지 소망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쉼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다윗의 시편들,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로 시작한 탄식시들도 노래가 깊어지며 마무리될 때는 아픔과 고통과 답답함이 기쁨과 찬양과 감사와 만족과 깊은 신뢰로 올려집니다.
4. 그런데 왜 우리는 안식을 누리지 못할까?
왜 우리는 이런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걸까요? 어떻게 고난 중에도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믿음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안식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출애굽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3;17-4:2).
히 3:17- 4:2에서, 가나안 땅 경계에서 약속으로 주신 땅을 정탐한 10명 정탐꾼들이 거민 강하고 성읍 견고해서 가아안을 정복할 수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믿음이 없었습니다. 결국 믿음없는 그들 1세대는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반면 믿음을 가졌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식은 갈등이 없고 고통이 없는 편안한 것이 보장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수많은 전쟁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때로는 전쟁과 같은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안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5. 맺음말
예수님은 우리가 안고 견뎌야 하는 짐을 가지고 예수님께 와서 쉼을 얻으라고 초청하십니다. 짐은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죄와 상처와 관계의 문제와, 경제적인 어려움, 질병,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께로 나아가 하나님의 깊은 안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