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담임 목사님은 연말까지 안식년 이십니다.
말씀: 푯대를 향하여(빌3:12~14)
우리나라에 이산가족을 포함한 실향민들과 탈북민들의 소원은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소망입니다. 이땅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그리고 복음으로 통일이 오는 그날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잃었던 이스라엘이 2,000여 년 동안 디아스포라로 전 세계에 흩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이스라엘 정부가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렵게 디아스포라로 삶을 살 때, 나그네였던 그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만든 용어가 있습니다. 그 말은 시오니즘 입니다. 이 말은 19세기에 만들어진 말이고, 유대 국가의 신념이라고 합니다.
나라를 잃고 어려움이 있었지만, 시온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시오니즘’(Zionism)이라는 말이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국에 있던, 유럽에 있던, 아프리카에 있던지 그들은 그 ‘시오니즘’이라는 소망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망처럼, 1948년에 이스라엘 정부가 건국되었습니다.
독일에 유명한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1926~ )는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가 집중한 것은 희망(소망)입니다. 크리스천들의 희망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푯대를 향하여’ 라는 제목으로, 소망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소망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구약, 신약)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 약속들이 현실에 이루어질 것과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히브리서11:1).
그런 면에서 신앙은 미래를 지향하는 힘이며, 이러한 미래적 지향성을 소망이라고 합니다. 소망은 사람마다 다양하지만, 신약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한 가지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미래의 소망과 관련해 유별나게 강조한 것은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시 오실 재림 신앙(마라나타 신앙, 계 22:20)과 결부되어 초대 교회에 희망의 초석을 쌓았습니다.
2. 달려 가노라 (12,14절)
그런데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불확실성의 장벽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소망을 붙잡은 꾸준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져 버릴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도덕적으로 해이해지고 미혹을 당하는 것은 이러한 재림과 부활의 소망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소망을 말하면서 함께 언급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사도 바울은 ‘소망의 인내’(데살로니가전서 1:3)와 함께 ‘소망의 투구’(데살로니가전서 5:8)를 언급합니다.
소망은 인내해야 하고 싸우면서 방어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은 단순한 기다림이나 시간 때우기가 아닙니다. 소망은 ‘시간적으로는 기다림이지만 공간적으로는 목표를 향해 뛰는 달리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달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목표, “푯대를 향하여(14절)”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과 푯대를 향하여 부단히 달려가서 마침내 소망(소원)의 항구(시편 107:30)에 도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라”(전도서 9: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소망은 살아있는 자들의 것입니다. 요즘 많이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둡고 힘든 전망들도 있지만, 소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이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간 것처럼, 우리들도 하늘나라의 시민권(빌 3:20)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살아가야 됩니다. 크고 작은 문제들과 어려움들이 있어도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온 교회가 하나 된 소망을 품고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며 달려가는 소망의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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