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난관 돌파1, 주 안에 머물라(요15:1~11)
1.
1949년에 쓴 함석헌 선생의 글 입니다. 해방된 조국에 어려움이 계속되는 와중에 나온 글임을 염두에 두고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에겐 묵묵히 서 있음이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에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에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 걸
나는모르고 의심했소이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속에 눕게 하소서!
선생은 ‘그대’를 나무랐고, 비웃었고, 의심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대’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계속되는 나라와 삶의 난관 앞에서 물어도 대답없고, 대들어도 아무 소리 못하고, 관심도 두지 않는 듯한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고백합니다. ‘모르고’ 그랬습니다. 몰라서 나무랐고, 몰라서 비웃었고, 몰라서 의심했습니다. 당신은 크신 그대시며, 높으신 그대시며, 무거운 그대시며, 은근한 그대이십니다.
선생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면 좋겠습니다. 선생만 그런게 아니라 우리도 때마다 다가오는 막다른 골목, 삶의 난처험과 난관으로 인해서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은근한 그대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고백하면서 오늘 말씀 제목 처럼, 난관에 무너지지 말고, 난관을 돌파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난관을 돌파하는 방법은 꽤 있겠지만 ‘크신 그대’를 신앙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대’와 마주 앉아, ‘그대’ 품속에 있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겠습니까?
2.
오늘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보면 주님도 함석헌 선생과 동일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두려움과 의심으로 무너지고 있는 제자들을 보면서 ‘함께 난관을 돌파해 보자’.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게 잘 알려진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15장의 말씀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Key)는 이 말씀이 선포되는 시점에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며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을 언제, 왜 했는지를 아는게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어떤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하셨습니까?
와해되고 있는 제자들, 무너지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는 그 짐이 너무 버거워서 떠날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 15장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속에 제자들의 속 마음이 그대로 들어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 제자들의 대세는 주를 버리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요15장은 목요일 오후 10시 전후에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동하는 중에 하셨거나, 최후의 만찬 식탁에서 하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긴급한 때이고, 위험한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주님은 이런 난관 앞에 무너지지 말고 돌파하라는 것입니다.
15장에 보면 두개의 그림이 나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가 나오고, 친구라는 그림이 나옵니다. 둘 다 비유입니다. 5절. 나는 포도나무고 너희는 가지다. 14절. 너희는 나의 친구다. 무슨 얘기입니까? 너희는 나의 가지고, 친구이니 이런 신분의식과 존재 의식을 가지고 난관을 돌파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가지와 친구가 가지고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서 나무의 생명을 나누는 특권이 있고, 친구는 친구로서 친구와 뜻을 함께 나누고, 아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런 특권이 제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새겨 주고 계십니다. 이런 특권으로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비유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깊은 애정이 담긴 명령이고, 당부입니다.
3.
여러분들은 난관을 어떻게 돌파해 오셨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름의 방법과 처세로 하셨겠지만 이제부터는 오늘 말씀에서 주신 주님의 방법대로 돌파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게는 이게 최고의 방법이고, 믿을만한 방법입니다.
주님은 선택하라 하지 않고 명령하셨습니다. 가지인 너희들, 참 포도나무인 ‘내 안에 거해. 머물러’(4절). 이 명령의 소리가 엄중하게 들려야 합니다.
난관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참을 분별하라(1절)
난관의 때, 난세의 시대에 깊게 살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참과 거짓의 분별입니다. 참과 거짓, 진실과 허위를 분별하지 못하면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고, 사람들은 그런 거짓과 허위에 속아서 거짓 쪽에 붙을 수 있습니다. 거짓 쪽에 붙으면 어떻게 될까요? 난관을 돌파하는 게 아니라 더 깊게 난관에 파 묻혀 버리게 됩니다.
1절에서 주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시작하면서 의미심장한 단어 하나를 붙이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다’ ‘참’이라는 단어 보셨습니까? 나는 포도나무다 하지 않으시고,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참’자를 왜 붙이셨을까요? 거짓이 있기에 ‘참’자를 붙이셨습니다.
구약에서는 거짓 포도나무를 들포도나무라고 하는데, 참이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거짓된 우상을 따르다가 만신창이가 된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어야 하지만 아무 나무한테 붙으면 안됩니다. 반드시 생명을 주는 나무, 진실과 구원을 주는 나무에 붙어야 거기서 생명을 만들어내고,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난관을 돌파하는 힘은 참과 진리, 진실에서 나오지, 거짓과 위선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난관의 때 일수록 참과 거짓, 진실과 허위, 하나님과 우상을 예리하게 분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과 거짓을 뭐로 분별 할 수 있습니까? 열매, 보여지는 것으로 분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보여지는 것도 다가 아니기에 조심해야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보여지는 열매로 분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는지, 그 행위와 말과 삶 속에 정의가 있고, 공의가 있는지? 말만 정의롭고, 공의로운 것은 아닌지. 말만 그렇다면 그건 거짓이고 위선이지 참이 될 수 없습니다.
위선과 거짓으로는 난관을 돌파 할 수 없습니다. 나라든, 개인이든 참과 진실이 있을 때 시간이 걸려도 어려움을 극복 할 수가 있지, 위선과 포장으로는 안됩니다. 그래서 난관이 올 때마다 예민하게 봐야 됩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심판하시고, 참을 세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진리, 참, 진실함에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있습니다. ‘아무리 어리석어도 남을 꾸짖는 데는 밝고, 아무리 총명해도 자기 잘못을 깨닫는 데는 어둡다’ (人雖至愚,責人則明.雖有聰明,恕己則昏)(인수지우, 책인즉명. 수유총명, 서기즉혼) 진실을 보는게 쉽지 않습니다.
강한 자기 편향성을 극복하고, 볼 줄 아는게 ‘성숙’입니다. 성숙은 다른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던 것, 들리지 않던 것, 깨닫지 못하던 것, 자기 위주로만 보던것, 감지 할 수 없었던 것을 보고, 듣고, 깨닫고, 감지해 내는 게 성숙입니다. 난관에 부딪칠수록 이런 성숙이 절실합니다.
난관은 눈을 막고 귀를 막아서 성숙하지 못하게 하는데 그럴수록 감각의 촉수를 예민하게해서 버려야 할 것 있으면 합리화하지 말고 버려야 합니다. 난관의 돌파는 여기서 부터 시작됩니다.
참과 거짓을 예민하게 분별해내는 성숙함이 곳곳에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힘들수록 ‘참’이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진리, 마음것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힘’이 생깁니다.
(2) 주 안에 머물라(4절)
그래서 주님이 명령하시는 게 4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 ‘거한다’는 말은 머문다는 말이고, 산다는 말입니다. 난관 때문에 떨어지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떠나지 말고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5절부터 한번 더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은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떠나지 말고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함께있으면 죽을 것 같겠지만 살것이고, 떠나면 살 것 같겠지만 죽는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사즉생, 생즉사입니다.
주 안에 머무는 것을 ‘가지의식’(Branches consciousness)이라고 합니다. 신자는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있는 가지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존재. 주님에게 붙어 있는 존재. 이게 그리스도인입니다. 버려서는 안되는 의식입니다.
9절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머물라). 도망갈 때만 재고 있는 사람들이 뭐가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합니까? 그런데도 제자들의 먼지 잔뜩 묻어있는 더러운 발을 허리 구푸려 씻어 주시면서 사랑하니 가지 말고 함께 하자고 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사랑하실까요? 느껴 보십시오. 이 사랑이 느껴지고, 깨달아 질때 난관을 돌파하게 하는 매우 강한 힘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곳곳에 많은 것들이 막혀 있습니다. 난관에 지지 말고 주님과 함께 돌파해 나가는 용기와 성숙과 기쁨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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