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39: 자기 부인(막8:34~38)
10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502주년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뜻 깊은 주일, 주어진 말씀을 통해 우리도 개혁하고, 고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요즘 말로 핫한 단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단어가 핫한 단어입니까? ‘자기’라는 말 보셨지요! 자기만 6번 나오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뜨거운 단어고, 없어서는 안되는 단어입니다. ‘자기’가 없고, ‘자기’를 무시해 보십시오. 큰 일 납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핫한 단어에 찬물을 뿌리면서 식혀 주고 계십니다. ‘자기’ 그만 내세워. 그 정도하면 됐어. ‘자기’를 더 내세우면 너희들의 삶이 망가진다. 이제부터 너희들이 할 일은 자기를 주장하는 것 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낮추고 나를 따라오는 거야. 이게 너희를 살리는 길이고, 구원하는 길이야.
34절 다시 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하는 중심 말씀입니다. 弟子道(discipleship)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34절이 제자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제자도 할때 도는 길 道자를 써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가야 할 길, 주님을 믿는 이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도리, 방식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도를 말씀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누구니? 하고 물을 때, 대답 잘해서 칭찬 받았지만,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자기를 폼나게 해 주는 그리스도라는 게 밝혀집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서 34절의 말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려면 자기 주장, 자기 생각, 자기 판단을 내려 놓고 십자가를 질 각오 하고 따라와야 한다는 것을 밝혀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이미 따라왔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앞에 두고 다시 묻고 있습니다. 폼나는 승리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데도 따라 오겠느냐? 재결단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주님은 이 시점에서 무리들을 불러 제자들과 동일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무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는 사람들입니다. 배 고프면 오고, 아프면 왔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떠나는 사람들인데 그런 이들에게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고, 주님을 따르는 헌신의 길로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도, 제자의 길은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길이고, 삶의 방식입니다. 목사도 이 길을 가야 하고, 여러분들도 가셔야 하는 길입니다.
2.
제자도는 받기 쉽지 않은 말 같지만 사실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뜨거운 초청이고, 진한 사랑이 담겨있는 권유입니다. 왜 뜨거운 사랑이 담긴 권유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치유’’회복’’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자기를 내려 놓을 때 얻게 되는 것은 상상 이상입니다.
자기 부인은 자신의 인격을 부정하라는 게 아닙니라. 내 안에 있는 육적인 자아, 죄된 자아가 있는데 그런 자기를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기형도 시인의 한 말이 있습니다. 자기만, 나만 있을 때 ‘내 영혼의 검은 페이지만 늘어난다’. 자기만 있고, 너는 없는 자기 중심성의 결론은 ‘부딪침’과 ‘상처’로 끝날때가 태반입니다. 시인의 말처럼, 내 인생의 날에 ‘검은 페이지’만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인 해 보셨습니까? 자기 부인은 자기를 높이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면 교만이 나오지만, 자기를 낮추면 겸손이 나옵니다. 겸손하면 주장보다는 내려 놓게 되고, 양보하게 됩니다. 그 양보가 사랑을 만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 생각해 보십시오. 내 뜻 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26:39). 이 내려놓음이 구원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자기를 조금만 낮춰도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낮춤과 양보와 겸손은 ‘해빙과 끌림’이라는 귀한 선물을 줍니다. 해빙이라는 절대 녹을 것 같지 않던 차가움이 녹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구요, ‘밀어내기’만 하던 삶에서 ‘끌리는’, 그래서 ‘함께-있고’ 싶어지는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일어나고, 이웃, 타자들에게서도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고, 사람들을 향한 고마움이 생겨 나게 됩니다. ‘해빙과 끌림’이라는 기분 좋은 ‘사태’가 여러분들에게 일어나기를 바라겠습니다.
3.
자기 부인은 없으면 안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가져야 하는 삶의 기본이고, 중심입니다. 신자의 삶에서 없으면 안되는게 있습니다. 순종, 사랑, 믿음, 겸손 같은 것들인데 없으면 안됩니다. 이런 가치는 자기 주장의 마음을 버릴때 얻어집니다.
순종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에게 순종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기초고 출발입니다. 순종할 때 변할 수 있지, 순종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면 변할수가 없습니다. 빌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겨라’, 롬12:10 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이런 말씀에 순종하려면 자기 부인이 일어날때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각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그 가슴 속에 일종의 왕국을 가지고 있다’(Inst.3.7.4) 부인하기 힘든 저와 여러분들의 상태입니다. 이걸 깨야 저이가 나보다 낫다는 인정, 사람들과 어깨 동무하고 사는 유쾌한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높임과 교만은 아차하는 순간에 나오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려면 자신의 본성을 강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프랑스 사상가 모리스 블랑쇼(1907~2003)가 한 말 있습니다. ‘죽어가는 자가 타자와 만난다’ 뒤집어서 읽으면 타자와 만나려면 죽어가는 자가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자는 자기를 낮춘자, 주장하지 않는 자입니다.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한 순간이기에 그 때 비로서 진심으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 가득해서 만남이 사라진, 가벼운 만남만 가득한 세상, 문명,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맞는 말 아닙니까? 에고라는 힘이 너무 세면 누구도 진심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이용은 하겠지만 ‘만남’은 없습니다. 자기라는 강한 힘이 좀 빠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도 할 수 있고, 화해도 할 수 있고, 주님도 따라 갈 수 있는 겁니다.
4.
그래서 여러분들 살펴봐야 됩니다. 자기 주장이 얼마나 강한지, 자기 부인은 얼마나 하는지, 주님을 어떻게 따르고 있는지?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는지, 아니면 베드로처럼 주님을 이용해 덕을 보려고 하는 마음만 가득한지? 살펴 보지 않으면 모를 일입니다.
자기분석을 해 봐야 됩니다. 정신 분석에서 자기를 분석할 때 쓰는 도구가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사이에 자신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이게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무의식을 발견해서 치료해야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는 게 정신 분석입니다.
신앙인들에게도 무의식이 있을 수 있겠지요. 정신분석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무의식을 살펴보면 어떤 무의식이 나올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더라도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은 믿지만 예수 잘 믿으면 힘들고 손해보고, 교회 가봤자 위선자들만 많다는 무의식으로 차있을까요?
어떤 무의식이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을 따르려는 무의식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무의식이 세상적이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은 힘들 수 밖에 없고, 신앙 생활은 자유가 아니라 억지, 억압이 되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고쳐져야 제자도를 가진, 신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겉보다는 속을 잘 살펴야 됩니다.
수 많은 것들이 우리의 무의식을 공격하기 때문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는 무의식의 좋은 먹이감입니다. 성공해야지, 잘나야지, 뽐나게 살아야지. 이런 것들이 우리의 무의식에 계속 들어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 버립니다. 그러면 신앙생활하면서도 신앙생활이 궁상스럽게 보여지고, 하찮게 여겨지게 되는 겁니다. 이런 근본 마음이 치료되야 주님을 따르는 삶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마음, 신앙적인 무의식을 고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루 아침에 나를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도의 길은 실패와 고통을 통해서 배워나가는 긴 과정입니다. 늦었다 생각하지 말고 자기 주장을 줄여 나가는 예수 따름의 삶,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겠다는 열망과 무의식이 여러분들에게 풍성해 지기를 바라겠습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