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0 주일설교. 마가복음 강해 38: 뿌리 찾기(막8:27~33).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강해 38: 뿌리 찾기(막8:27~33)

1.
오늘 본문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난감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보셨습니까? 스승과 제자 사이에 경고가 남발하고 있고, 급기야 사탄이라는 험악한 단어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30절. 경고하시고, 32. 항변하매 33. 꾸짖어. 스승이 경고하면 제자가 항변하고, 제자가 대드니까 스승이 꾸짖고. 한글로는 다른 단어로 쓰여졌지만 원문에는 세 단어가 전부 똑 같습니다.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 ‘꾸짖다’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32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항변은 베드로의 꾸짖음입니다. 한 성깔하는 베드로가 ‘말 같지 않은 소리하지 말라’면서 강하게 반발하면서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태가 심각합니다. 주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림이었을 겁니다. 27절에 보면 주님과 제자들은 지금 빌립보 가이사랴에 있습니다. 지도 보시면 알겠지만 빌립보 가이사랴는 이스라엘 최북단입니다. 이제 주님은 여기서 시작해서 갈릴리를 거쳐 최후의 격전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게 됩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31절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31절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서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마가복음에 세번의 수난 예고 기사가 나오는데 이번이 처음 수난 예고 기사입니다.(9:31, 10:33). 거대한 먹구름과 폭풍이 밀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희미하게 알면, 이겨낼 수 없는 상황들입니다. 그래서 질문하셨던 겁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이런 질문을 우리는 ‘존재 물음’이라고 하는데,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는 시점에 제자들에게 분명히 해두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

2.
존재에 대한 물음,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아무 때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을 때 하게 됩니다. 나라가 잘되면 나라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 나라에 대해서 묻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인생에 대해서 묻게 되는데,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잘하고, 교회가 잘하면 굳이 교회가 뭐냐, 예수가 누구냐? 이런 질문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잘못하고 있으면 물어봐야 합니다. 신앙은 무엇이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냐?

어떤가요? 이런 존재 물음이 지금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한게 아니라 절실합니다. 무엇을 믿는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지? 물어서 답을 얻고 가지 않으면 바닥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 못지 않게 우리도 점검하고, 수리해야 할 때입니다. 어느 정도 수리해야 할까요? 수리에 3가지가 있습니다.

① 약간 고치는 수리=Repairing, ② 전체 다 뜯어 고치는 Remodeling, ③ 다 허물고 다시 짓는 재건축 Rebuilding이 있습니다. 셋 다 힘들지만 제일 힘든 것은 Rebuilding 입니다.힘들지만 가장 확실한 수리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수리는 기초를 분명하게 세우는 리빌딩입니다. 기초, 뿌리가 단단해야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초, 우리의 뿌리는 뭡니까? 교회라는 제도도 아니고, 교인이라는 형식도 아닙니다. 우리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명한 표현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다( Christianity is Christ). 한자로 기독교 할 때 기독(基督)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이고, 근본이고, 뿌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뿌리를 찾아서 그 뿌리에 젖붙임을 당할 때 예수의 사람이 되고, 예수의 교회가 되서 예수님께서 꿈꾸신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뿌리 찾기인데, 예수라는 뿌리, 내가 만들고, 내가 바라는 예수가 아니라, 존재했던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뜻을 선포했던 그 진짜 예수님을 찾아 그 위에 나를 세울 때 온전한 리빌딩, 온전한 고침, 참된 새로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뿌리는 흡수하고, 저장하고, 지지합니다. 예수의 정신과 뜻을 흡수하고, 그것을 내 안에 가득담아 저장하고 있을 때, 어떤 푹풍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로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나는 기독교인이다’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고백이 힘을 갖으려면 내가 고백하는 예수가, 내가 바라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고백이 될 때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보십시오. 주님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그리스도’라는 엄청난 대답을 합니다. “당신은 요한도 아니고 엘리야 아니고, 예언자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던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이십니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고백 때문에 많은 칭찬을 받습니다.

근데 보십시오.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할 거라는 말씀을 하게 되는데, 그 얘기를 듣자마자 베드로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예수님께 대듭니다. 대든 이유가 뭡니까? 자신이 생각하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대든 겁니다. 베드로가 기대한 메시아는 고난 받고 죽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승리의 메시아고, 자신들의 원함을 이루어 주는 메시아 였습니다.

메시아가 죽으면 누가 나쁜 놈들(로마인들, 로마에 부역하는 자들)을 물리쳐서 구원해 줍니까? 장관도 되고, 총리도 해 봐야 되는데 메시아가 죽으면 다 꽝 되버리는 겁니다. 꿈에도 생각 못했던 그림인데, 메시아가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33절에서 주님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다가 사탄이라는 야단까지 맞게된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장면들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소원과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볼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어찌됐던 주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셔야 됩니다. 그래야 주님이십니다. 내 뜻 대로 안해 주면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는 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따라와야 기도도 하고, 감사도 나옵니다. 버리기 힘든 종교성인데, 참 잘봐야 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4.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물어 보십니다. 사람들 말고, 제자들 말고,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에게 기대하는 게 뭐냐? 나를 따르려고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피하지 말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따를까요? 믿을까요? 역부족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 아닙니까?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있고, 내가 나를 버텨낼 수 있으면 굳이 예수님 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사람입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죄라고 얘기하는데, 기독교의 죄 인식은 상당히 현실적이고, 정확합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한번 보세요. 과장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자기’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가진 자기 중심성.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자기 중심성에서 교만이 나오고, 불화가 나오고, 이기심이 나오고, 거짓과 불의와 부정과 합리화가 나옵니다. 이게 다 죄입니다. 약간의 선, 약간의 의로움이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구해 주지 않고, 받아 주지 않으면 변할 수도 없고, 구원받을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시각입니다.

엡2장의 선언 기억나십니까? ‘여러분은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살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당신들을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살려 주셨습니다.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엡2:8,9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엡2:8~10상)

선물 같이 온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 그런 일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대봐라? 여기가 갈림길입니다.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 구원을 믿고 받아들이면 기독교인이 되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각자가 결단하고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논증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어느 부분까지는 논쟁하고, 토론 할 수 있지만, 어느 선에서는 결단밖에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며, 여러분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납득시킬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자신이 발견해야 하는 체험이고, 고백이고, 결단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5.
여러분들 잘 아시는 슈바이쳐 박사가 아프리카로 떠나기 직전에 예수님에 대해 쓴 글 한 대목 읽고 마치겠습니다.

호숫가를 따라서 그분은 이름도 없고, 나이도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오신다. 그분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그분은 우리 시대를 위해 하셔야 할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다. 그분은 명령하신다. 순종하는 이가 지적인지 단순한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분은 투쟁과 갈등과 고통 속에서 자신을 보여주신다. 그분과 우정을 맺으면 그 투쟁과 갈등과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러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서, 그들은 그분이 누구인지를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겁니까? 자신만이 겪는 고유한 삶의 경험, 희노애락, 실패와 성공, 인생의 고단함, 유한함을 통해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의 선포와 구원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갈등과 고통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놓지치 말고 만나십시오. 지성으로 나타나지 않고 영성으로 나타나십니다. 지성보다 영성이 훨씬 더 깊고 풍성하고, 놀랍습니다. 지성 때문에 영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뿌리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뿌리 찾기에 성공하고, 뿌리 찾기에 기뻐하는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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