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6 주일 설교: 저항, 다시 시작하는 힘(시51:1~19). 양은익 목사.

 


말씀: 저항, 다시 시작하는 힘(시편51:1~19)

1.
시인 윤동주는 어둠이 짙은 시절이었지만(1941) 가을로 가득차 있는 하늘의 별을 세면서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별 하나 세고 어머니 불러보고, 또 다른 별을 세면서는 소학교 때 친구들 이름을 부르면서 가을의 날들을 그리움과 사랑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가을을 보내시겠습니까? 이왕 보내는 가을, 오늘 말씀 12절에서 다윗이 고백하는 것 처럼,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그래서 그동안 계속 말씀드렸지요? ‘다시 일어나고, 회복하는’ 기쁨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주일 말씀 드린 것처럼 ① 핑계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② 다시를 막는 것들과 저항해야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저항, 다시 시작하는 힘’으로 되 있는데, 저항은 ‘다시’를 소망하는 이들이 품어야 할 중요한 마음의 다짐이고, 자세입니다. 강하게 저항해야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2.
오늘 시편 51편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다윗의 참회시로 유명한 시편입니다. 어떻게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 눈에는 무너진 한 사람이 찢어진 마음(상한심령)을 가지고 자신의 무너짐에 ‘저항’하는 모습으로 보여졌습니다. 시편으로만 읽으면 상당히 말랑말랑한 은혜가 넘치는 시편으로 보여지지만 사실은 한구절 한구절이 무너진 자신과 자신을 무너지게 한 죄성과 욕망에 저항하고 있는 저항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14절.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다윗이 무슨 피를 흘렸습니까? 자신이 가진 힘으로 목욕하는 여자 밧세바를 범하고, 그 일이 탄로날까봐 충성스런 부하,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게 만듭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든 영웅아닙니까? 그런 영웅이 영광의 정점에서 파렴치한으로 추락해 버린 겁니다. 묻혀지면 좋았겠지만 묻혀지지 않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대놓고 ‘당신이 죄인’(삼하12:7)이라고 말합니다. 나단의 돌직구에 놀랐는지 다윗은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향한 참회와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3.
회개는 죄에 대한 저항입니다. 핑계는 자기를 방어하는 것이지만, 회개는 자신에 대해 저항하는 것입니다. 무너진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무너지지 않겠다는 저항, 버텨내겠다는 마음의 다짐이, 회개입니다. 다윗이 왜 무너졌습니까? 유혹에 저항하지 못해서 무너진 것입니다. 저항해야 할 것에 대해서 저항하지 못하면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항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무너진데서 일어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뭔가를 ‘다시’ 하려면 ‘다시’를 막는 것들에 저항해야 됩니다. 더 이상은 안된다는 마음, 감정이라는 방해, 너는 아니라는 교만, 자신 없다는 생각들, 환경이라는 굴레들. 다 ‘다시’를 막는 것들인데, 이런 것들에 강하게 저항할 때 ‘다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담배로 폐가 망가졌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독하게 저항해야지요. 저항하지 않고 ‘한 모금’의 유혹에 넘어가면 ‘다시’는 없습니다. 모든 이치가 비슷할 겁니다. 구원, 일어섬, 회복, 만회는 저항을 통해서 얻게 되는 선물입니다. 자신의 부족함, 실수, 수치, 실패에 무너지지 않고 저항 할 때 ‘다시’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회복은 공짜가 아닙니다!!

회복은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회, 은혜입니다. 은혜가 필요하면 저항하십시오. 죄에 대해, 실패에 대해, 무너진 것들에 대해 저항해야 기회가 열립니다. 자기 방어만 하고, 저항이 없으면 ‘다시’는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다’ 싶은 것들이 있으면 저항하십시오. 그래야 Begin Again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개인 가정 교회 나라. 다 똑같습니다.

4.
저항하려면 세 가지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① 자신에 대한 성찰 ②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③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1) 자기 성찰(省察)
저항은 자기를 성찰하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 이게 내 모습이구나’ ‘내가 이것 밖에 안됐나?’ 라는 생각이 번쩍들 때 저항이 시작됩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임신시키고, 우리아를 죽인 다음에 일이 다 끝난줄 알았습니다. 절대 권력 다윗의 위세 앞에 누가 감히 입을 놀리겠습니까? 우리아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전부 숨죽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등장해서 다윗에게 이야기 하나를 던져 줍니다.

양과 소가 많은 부자가 자기 양이 아까워서 새끼 양 한 마리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서 손님을 대접했다는 얘기를 합니다. 다윗이 그 얘기 듣고 ‘죽일놈’이라고 격노합니다. 나단 선지자는 격노하는 다윗을 보면서 직격탄을 날립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요’ 그러면서 다윗의 악행을 낱낱이 고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삼하12:1~15)

지금 다윗은 절대 권력의 맛을 들이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못할게 없는 사람이고, 누구도 자신이 한 일과 한 말에 대해서 토를 달 수없는 사람인데 은폐된 줄 알았던 자신의 치사한 죄가 나단 선지자에 의해서 드러나고 있는 겁니다. 다윗은 나단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 다윗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 순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다윗은 핑계로 자기를 방어하지 않고, 인정합니다. 사무엘하 12:13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4절과 9절에서도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주님의 판결은 옳으시며 주님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주님의 눈을 내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십시오’(새번역) 보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죄와 부끄러움을 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다시’ 일어나는’ 저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떤 ‘다시’든 ‘다시’가 살아나려면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자기 성찰’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게 내 모습이구나’

자기 성찰을 못하면 남는 것은 ‘아집’(我執) 밖에 없습니다. 아집은 다른 사람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 독선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감정에 갇혀 있는 게 아집입니다. 영어로는 Egoist입니다. 아집은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막습니다. 자기 성찰과 아집은 부딪칠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집을 내려 놔야 ‘다시’가 시작됩니다. ‘죽어도 못고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고집은 부릴 수 있지만 아집은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아집으로 인해 관계가 망가지고, 가정이 깨지고, 믿음마저 버린다면 얼마나 치명적입니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아집에 저항하십시오. 그래야 ‘회복과 만회와 ‘다시’’의 기쁨이 만들어집니다.

(2)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判斷)
저항의 두 번째 조건은 ‘판단’입니다. 판단은 판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정하는 게 판단입니다. 판단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판단이 살아있어야 잘잘못을 판정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게 됩니다.

판단하려면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판단 기준은 분명합니다. 내 감정도 아니고, 내 주관도 아닙니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판단을 한다고 하는데, 인공지능도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판단 기준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기준으로한 양심과 진실과 진리가 판단 기준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나를 살피고, ‘아니다’ 라는 판단이 나오면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치면서 저항하는 겁니다. 그 저항이 ‘다시’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판단을 받고 나서야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4절. 다시 봅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주님의 판결은 옳으시며 주님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새번역) 주님의 판단이 옳고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 미스를 보면서 다윗이 13절에서 고백합니다. ‘반역하는 죄인들에게… 판단을 잘못해서 자신처럼 무너지는 이들에게… 내가 주님의 길(판단, 진리)을 가르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죄인들이 (자신처럼 )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판단을 영적 분별이라고 불렀습니다. 분별은 삶을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중요한 힘입니다. 분별력을 가지려면 두 가지를 물어야 합니다. ① 내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말씀에서 말하는 대로 가고 있는가? ② 내 행동이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있는가? 유익을 주고있다면, 제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내 행동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소망을 주고, 희망을 주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불신과 절망과 실망과 상처와 고통과 불안을 주고 있는가?

두 가지만 물어도 분별력이 살아납니다. 분별은 성도의 삶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분별의 지혜와 분별의 능력이 여러분들에게 풍성해 지기를 바라겠습니다. 보장합니다. 분별력이 깊어질수록 ‘다시’의 기쁨은 많아 집니다.

(3) 저항의 힘
저항의 세 번째 조건은 저항하는 힘입니다. 저항하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성찰과 판단을 통해 분별하고, 발견했다면 다윗처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17절)을 가지고 저항해야 됩니다. 나단의 뼈아픈 지적을 받고 무너져 버린 자신을 보자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0절입니다. ‘하나님여 내 속에 정한(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견고한 심령)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51:10~12)

‘다시’의 저항이 필요할 때 마다 이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무너진 나, 아픈 가정, 아픈 삶의 상황, 무너진 믿음을 ‘다시’ 시작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가장 큰 힘은 성령에게 있습니다.영적 존재인 사람은 성령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사람이 될 수있습니다. 성령을 의지하시고, 구하시고, 찾아십시오. 저항의 힘을 주셔서, 무너질 때마다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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