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그리고 회복하소서(요 21:15~17)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삶의 여정 중에 중요한 변환점을 갖는 사건입니다. 깊은 고뇌로 다시 갈릴리로 돌아온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찾아 오시며, 회복으로 이끄시는 말씀입니다. 왜 다시 갈릴리로 와서 그물을 던지게 되었는지 이전의 상황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두려움으로 지내던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고 또 도마에게는 직접 만져 보게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을 가지고 흩어졌고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은 디베랴 호수, 갈릴리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어부였던 베드로가 갈릴리에서 처음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약속을 받았던 곳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거동락하며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권능으로 수많은 기적을 보고 체험했습니다. 베드로는 늘 앞장 서서 말하고 행동하던 제자였습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열정적으로 따르며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b) 말합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닭 울리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한다고 하시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진심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고백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신 권능의 주님을 보아 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영광을 잇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정치적 왕을 기대하는 것을 보았고, 무엇보다도 자신도 그러한 메시아를 열렬히 기대하고 있었기에 그 순간은 신념을 가진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권능을 보아 왔던 베드로는, 주님의 죽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도 주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의 반응은 결코 그런 일이 생길 수 없다고 항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1~23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죽임 당함과 부활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이야기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b) 그러자 주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책망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며 놀라운 기적을 보아 왔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다른 제자들은 감히 해 보지 못한 물 위를 걸었던 경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3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든든하게 서 있는 줄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난도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강함이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상상하지 못한, 아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정말로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잡히시고 사람들로부터 능욕을 당하시는 고난과 죽음을 대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 69~75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집 바깥 뜰에서 여종들과 다른 사람들의 묻는 말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닭이 우니,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납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가장 연약한 모습을 대면했습니다. 자신은 적어도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몇 시간 전까지도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없었습니다.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을 알리기 위해 저주와 맹세까지 하며 위기를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이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성공하려는 꿈이 헛된 것이라는 절망에 사로잡혔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모든 걸 내려 놓고 주님을 따라 떠났던 갈릴리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채찍에 맞으시며 신음하시며 피범벅이 되신 예수님, 고통스런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뒤로 하며,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과 낙망함으로 얼룩져 어쩌면 도망치듯, 쥐구멍을 찾듯, 고향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누가 베드로를 보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지적할 수 있을까요? 사실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21장은 그러한 베드로에게 갈릴리로 찾아 오신 장면입니다. 혼내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셔서 조반을 챙겨 주시고 함께 식사를 하시며, 베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 오십니다. 베드로를 처음 찾아오셔서 주셨던 소명,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삶을 일깨우시며 회복시키십니다.
성경에는 자신의 연약함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을 찾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에게 찾아오셔서 회복하셨습니다. 육신의 정욕으로 죄를 짓는 자신의 모습에 울었고, 또 부귀영화를 누려도 한때의 인생의 육체의 유한함과 허망함에 울었습니다. 인생의 끝을 인식하고 나그네됨을 알고 그림자와 같은 허상을 깨달으며, 하나님께 깊은 소망을 둡니다. 시편 39편은 이를 잘 나타냅니다. 특별히 한 구절 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1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2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3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두 번째는 누가복음 18:9-14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대조되는 세리의 모습입니다. 세리는 사람들로부터 자기가 죄인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13절에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분명히 이스라엘 동족으로부터 돈을 받아 로마에 바치는 잘못하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그대로 올려 드렸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11절에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며, 덧붙여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린다고 당당히 서서 기도합니다.
주님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이는 이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린 사람을 주님은 들으십니다.
세 번째 예로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했던 많은 교회들의 연약함과 회개입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거부는 생존의 위협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사실은 살기 위해 신사참배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분들을 일괄적으로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인 교회들이었습니다. 이후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며 겸손하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신사참배 사실을 고백하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죄인된 마음으로 해방 후, 나라와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겼습니다. 주님은 그 통회를 받으시고 이 땅에 많은 교회를 일으키시고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보게 될 때 아프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을 깊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통곡은 은혜입니다. 고뇌의 자리에 하나님은 분명히 찾아오십니다. 오셔서 깊은 위로와 회복과 소망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질문하고 도전해 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가슴 깊이 절감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그 연약함을 놓고 우는가? 내 안에 의로 여기며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지는 않는가?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위로와 회복을 얼마나 기다리고 사모하는가?
베드로에게 이 갈릴리의 경험은 이전과는 다른 베드로로 서게 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이전에 예루살렘 대제사장 바깥 뜰에서 두려움에 숨어서 주님을 부인하기까지 한 베드로는 이후 같은 장소에서 섭니다. 공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사람들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고 당당하게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갈릴리에서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우리의 신앙 여정에 수없이 많은 연약함으로 쓰러질 때, 그 앞에 그 실패를 올려 드릴 때, 찾아오셔서 어루만져 주십니다. 회복시키십니다. 처음 부르신 기쁨과 소명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