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12. 주일 설교: 꼴찌가 첫째 될 때(삼상18:6~12). 양은익 목사

 

말씀: 꼴찌가 첫째 될 때(삼상18:6~12)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18:6~12)

1.
오늘 제목은 ‘나중 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눅 13:30절의 말씀에서 따왔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 중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꼴찌가 첫째되는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는 것에는 본인 외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꼴찌가 첫째가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면 문제가 좀 심각해집니다. 잘 된 것에 대해서 축하해 주는 게 맞는데 잘되지 않습니다.

A. 슈바이처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같은 상황에 대입해 보면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자신의 운명과 삶도 바뀔 수가 있습니다. 과장 같지만 과장이 아닙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되는 것을 좋게 봐주지 못하다가 삶을 망가트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
우리는 그동안 사울이 다윗을 치열하게 추적하면서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다윗 죽이기에 사울은 모든 것을 다 겁니다.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사울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요, 다윗은 그의 사위입니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납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아들인 요나단과도 친합니다. 사울을 밀어내려는 어떤 역모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이유를 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승리를 축하하는 여인들의 노래에 사울이 무너집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8절입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말고 무엇이냐 하고, 9절.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이런 마음을 우리는 질투, 시기라고 합니다. 꼴찌가 첫째가 될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반응이 사울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분명히 왕 사울을 환영했다고 했고, 여인들이 부른 노래가 사울을 다윗과 비교해서 사울을 폄하하기 위해 부른 노래가 아닌데도 시기의 마음이 들어간 사울에게는 그렇게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운문 규칙(평행법)에 의하면 첫 행에 숫자가 사용되면 다음 행에는 처음 숫자보다 큰 숫자를 쓰게 됩니다. 처음에 천을 사용했기에 다음 행에 만을 사용한 것이고, 노래의 전체적인 의미는 승리를 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렇게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그토록 치열하게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유치한 것 같지만 ‘시기’와 ‘질투’입니다. 나중 된 자가 사람들의 칭송과 갈채를 받는 것에 속이 쓰렸던 것입니다. 10절 이하에도 나오지만 시기가 지배하는 순간 악령이 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발작을 하면서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벽에 박아 버리겠다고 하면서 창을 던져 버립니다.

3.
시기가 얼마나 무서운 감정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사울이 보여 주는 것처럼 시기는 갑자기 들어오고, 온갖 것들이 다 시기의 대상이 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내린 시기의 정의가 하나 있습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기뻐하고, 행운에는 애통하는 것’이다. 너의 불행은 내 기쁨이고, 너의 성공은 내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이 잘 되는 것을 봐 주지 못하는 게 시기입니다. 사울이 이 마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윗을 볼 때 좋은 마음으로도 볼 수 있는데 시기가 막고 있습니다. 18장에 보면 전부 다윗을 좋아합니다.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은 물론이고, 사울의 딸인 미갈은 다윗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사울의 신하들과 백성들 전부 다윗을 좋게 봅니다. 딱 한 사람 질투의 마음이 들어간 사울만 다윗을 배척합니다.

타자의 잘 됨과 성공을 기뻐하는 게 성숙인데, 시기가 들어가면 깨져 버립니다. 시기는 시기의 대상이 가까이에 위험합니다. 시기는 시기하는 마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기는 미움을 만들고, 미움은 험담으로 이어집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질투는 질투하는 대상에게 매이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쫓고 있는 사울이 쫓기는 다윗에게 묶여 있습니다. 때로 질투가 원인이 돼서 더 분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질투와 시기의 결과는 안 좋게 끝납니다. 벗어나야 됩니다. 어떻게 벗어나면 좋겠습니까?

4.
나중 된 자가 먼저 돼서 마음이 안 좋을 때 기억해 두십시오. ① 놀라지 말자 ② 시기하지 말자. ③ 인정하고 밀어주자. 이 세 가지 마음입니다.

(1) 놀라지 말자.
꼴찌가 첫째가 되면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 것처럼 놀랍니다. 마치 계속 별 볼 일 없는 자로 남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놀라는 게 질투입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군가 변화되는 걸 보고 놀라지 마십시오. 놀라는 대신 축해해 주십시오. 밝은 얼굴로 축하해 주는 것이 최고의 환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리에서 부름받았다는 것을 잊으며 안됩니다. 우리는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부른 받은 사람들입니다. 대단히 큰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인데 사람들의 변화에 놀라는 것은 격에 맞지 않습니다. 변화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보다 못한 이로 고정시켜 놓게 되면 거기서 독한 시기의 싹이 자라게 됩니다.

(2) 시기하지 말자.
사촌이 땅을 사든, 옆집 애가 일등 하든 시기는 사절하십시오. 잠14:30절 말씀처럼 시기하는 순간 뼈가 썩게 됩니다. 시기의 결과는 얼마나 치명적이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시기의 결과는 뼈 아픔입니다. 사라와 하갈. 라헬과 레아. 요셉과 그 형들. 한나와 브닌나. 요나와 니느웨 사람들. 시기로 인해 뼈아픈 일들을 겪었습니다.

시기 사회라고 불릴 정도로 시기가 넘쳐나는 사회 속에서 시기하지 않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시기가 없는 데가 없습니다. 교회와 신앙인들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기하지 말자는 정답만 가지고는 뿌리 깊게 박혀있는 시기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봐야 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이며,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인지 제대로 봐야 합니다. 신자들은 질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가시고, 하나님이 승리하실 텐데 속 쓰려 가면서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들의 질투와 시기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증상에 불과합니다. 사울의 질투 보십시오. 겉으로 보면 여인들의 노래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울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하나님을 떠난 그에게 시기는 너무나 쉽게 찾아왔던 겁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부족한 것에 대해서 시기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며 기대하시는 것은 업적이나 성공이 아닙니다.

뇌성 마비로 부족한 것 많았던 송명희 시인의 찬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는 고백이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잘난 것, 잘하는 것으로만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잘못하는 것, 실패한 것, 부족한 것, 부정적인 조건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그런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회복돼야 하고, 살아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에게 없는 가장 귀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아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3) 인정하고 밀어주자.
우리가 할 일은 시기가 아니라 인정과 밀어줌입니다. 세례요한의 말 기억나십니까?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요한이 주님보다 선배고, 인기도 더 많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시기하지 않고 기꺼이 예수님을 인정하고, 밀어 줍니다. 시기는 자신을 죽이고, 너를 죽이지만 인정과 밀어줌은 다 살립니다.

질투와 시기의 짙은 안개가 가야 할 길을 가로막을 때가 많습니다. 속상하게 하게 하고, 그늘지게 만듭니다. 삶에서 거둬 내십시오. 잘 되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지 말고, 시기하지 마십시다. 시기가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만이 가지는 명예로움입니다. 이런 넉넉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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