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그러나, 노아은(창6:5~12)
1.
저는 요즘 새롭게 돋아나는 연둣빛으로 물든 나뭇 잎 보는 맛에 푹 빠져 있습니다. 볼 때마다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어린이날이고, 수요일은 어버이날인데 나뭇 잎처럼 싱그럽고, 환한 날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들을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신다’는 시편 68:6절 말씀처럼 가족은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가정과 가족이 주는 위로와 힘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가정을 만드신 때부터 지금까지 가정의 행복과 가정의 믿음과 가정의 구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 알고 계시지요. 기대에 잘 부응하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게 많아서 그런지 우리는 가정의 얘기를 불편해합니다. 그래서 더 가정의 화목과 가정의 믿음을 세워 나가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2.
오늘 노아에 대한 본문을 읽었는데 노아를 통해서 보고 싶은 게 바로 이 문제입니다. 히 11:7절 보십시오. 노아 사건에 대한 결론을 한 문장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으니라’ 히브리서 기자가 보는 노아는 어떤 노아입니까? 방주를 준비해서 ‘그 집을 구원한 노아, 자신의 가족을 구원한 노아’입니다. 가족 구원을 노아 사건의 중심으로 볼 정도로 크게 보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 사건을 보면 만만치 않은 조건과 환경 속에서 만들어낸 구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오늘 보고 싶은 겁니다.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가족 구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일이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는 반증 같아 보이는데 여러분들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3.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고 방주를 지어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노아 시대는 구원이 불가능한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부패한 시대입니까? 하나님이 근심하고, 한탄할 정도로 악하고, 음란해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놓아가 그런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을 받은 겁니다. 심판할 수밖에 없어 심판하니 너는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 나이 480에 이 말씀을 받고, 600살 되던 해에 홍수가 일어나는 것으로 나옵니다.
노아는 120년을 오로지 방주 만드는데 쓴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그 믿음 가지고 홍수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 일을 한 겁니다. 말이 120년이지 그 긴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한 겁니다. 120년 동안 어떤 일이 노아에게 일어났을까요? 성경에 직접적인 묘사는 없지만 시대의 악함 속에서 놓아가 겪은 일은 아마도 상상 이상의 일들을 겪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생각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하는데 노아의 이런 모습을 보니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겠습니까? 노아는 그 시대의 이단자이고, 저잣 거리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아내고 있었을 겁니다. 방주를 짓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노아는 고립 무원이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노아의 가족입니다. 노아 자신이야 자신의 길을 가면 됩니다. 그러나 노아는 혼자가 아닙니다. 부인이 있고, 자녀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노아의 자녀들, 셈 함 야벳은 창5:32에 보면 노아가 500살 이후에 난 것으로 나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버지는 이상한 사람이었고, 자신들은 그 이상한 사람의 자식이었던 겁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겠지만 자라면서 받았을 마음의 짐은 글쎄요,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상상이었을 겁니다. 지금도 얘들이 아버지 직업이 이상하면 얼마나 힘들어합니까? 친구들이 비웃고, 사람들이 욕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들은 아버지를 원망했을 것이고, 아버지와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하시라고. 그 정도 했으면 됐다고. 홍수 나면 죽으면 된다고’ 그럼에도 노아는 중단하지 않고 끝내 해 냅니다. 우리는 이런 노아의 모습을 궁금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평판 한마디에 한없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가 사람인데 어디서 이런 뚝심과 고집이 나왔을까요!
4.
성경은 노아에게 있었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뚝심의 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8절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러나, 노아만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But Noah was different(메시지 성경) 다 부패하고, 다 악에 빠져 있는데, 그러나, 노아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다는 구절은 직역하면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가 됩니다. 영어 성경은 대부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But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ESV.NASB.NIV).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와 사랑과 즐거움을 발견했다.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었는데 노아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달랐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은혜가 있어도 보지를 못하지만, 그러나 노아는 보았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어도 보지 못하면 없는 게 돼버립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합니다. 걱정합니다. 근데 보지 못하면 아내의 사랑과 은혜는 있어도 없게 되는 겁니다. 은혜는 은혜를 알아보는 눈이 필요한데 노아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그렇게 은혜를 알아본 노아의 삶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며,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 120년을 견디게 한 힘이구요, 자신의 가족을 끝끝내 구원의 자리로 인도한 비밀입니다.
(1) 의인
오해하시면 안 될게 노아가 의인인 이유는 노아에게 어떤 죄도 없어서 의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기사에서 노아를 의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준행하는 노아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의인이다.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 하면 만듭니다. 방주에 들어가라 하면 들어갑니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합니다.(방주 만들라: 창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방주로 들어가라: 창7:5. 노아가 여호와께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순종이 쉽지 않다는 것, 우리가 얼마나 잘 압니까? 하지만 노아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다 합니다. 이 노아의 무모한 순종이 구원을 가져오고, 새 출발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무지개 기억나십니까?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사인인데 노아가 하나님께 받아낸 약속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당장에는 힘들고, 비난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살다 보면 나의 순종이 생명과 행복과 구원과 유익을 만들어 낸다는 것, 기억하십시다.
롬 5:19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 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한 사람의 순종과 불순종은 나 혼자 끝나는 게 아닙니다.
(2) 완전한 자
9절에 보면 노아가 완전한 자라고 돼있는데 이 표현 역시 노아가 어떤 흠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아의 완전함은 노아의 끈질김과 노아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고 쓴 말로 보면 됩니다. 노아는 정말 120년 동안 변함없이 홀로 그 일을 합니다. 나무를 자르고, 건조하고, 옳기고, 다듬고, 연결하고. 그뿐입니까? 나중에는 배에 들어갈 동물들을 챙기고, 음식 준비하고. 돈도 엄청 들었을 겁니다. 끈질겼기에 해 냈던 것입니다. ‘끈질김’ ‘한결같음’이라는 단어, 우리도 받아야 합니다.
가족들이 본 게 바로 노아의 끈질김입니다. 방주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하고, 끈질김이 있어야 합니다. 끈질김이 결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반대한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갔던 것은 노아의 끈질김과 한결같음에 설득당한 겁니다. 아버지로 인해 고통을 받았겠지만 어떤 비난과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그 힘든 일을 감당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진정성에 눈을 뜬 것입니다. 아버지가 미쳐서 저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알게 됐던 것이고, 마지막 순간, ‘이제 다 들어가자’ 할 때, 거부할 수 없는 힘에 끌려 들어가게 됐던 것 아니겠습니까?
노아 가족의 구원은 결국 노아의 삶이 만들어 낸 구원입니다. 노아는 생각날 때마다 툭툭 던지는 말로 그들을 설득하게 아닙니다. 그 정도 설득에 무너지면 사람이 아닙니다. 설득하려면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노아처럼 진정성 있게, 삶을 다 걸고,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면서, 방주에 타지 않으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끈질기게 온 힘을 다할 때 방주 쪽으로 다가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믿음의 복된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함께 방주에 들어가는 기쁨을 누리려면 노아를 잘 보십시오. 노아에게는 믿음과 삶이 일치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면서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매사에 순종했고,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 6:9. 새 번역)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방주에 타는 구원의 기쁨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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